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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행을 떠날 때 구시대적이지만 여행 가이드북을 산다. 책을 보면서 갈 곳을 추리다 보면 그 시간도 여행이 된다. 첫 장거리 여행으로 뉴욕행 비행기 표를 끊고서 여행 가이드북을 세 권이나 읽었다. 책을 읽는 저녁마다 뉴욕에 간듯한 기분이었다. 또 비행하는 동안 인터넷 연결 없이도 다양한 정보를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곧 내릴 도시의 풍경은 어떤 것일까, 상상하며 책 귀퉁이를 접는 순간이 어쩌면 여행의 가장 설레는 시간이 아닐까.
2
여행에서 뭔가에 쫓기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 탓에 보통의 여행자들과는 다른 길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봤다. 좌석이 지정이 아닌 것이 인상 깊었다. 최근 한국에서도 개봉한 최신 영화였는데 보는 사람이 네 명 밖에 없었다. 앞 좌석에 편하게 다리를 뻗어 올려놓고 봤다.
3
바르셀로나 해변에서는 엎드려서 네이버 웹툰을 봤다. 케언즈 해변에서는 이상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사랑을 믿다, 라는 소설을 읽었다. 한국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국의 땅에서 내 일상의 취미를 영위하는 게 파스타에 된장 넣는 것처럼 특별한 시간으로 느껴졌다. 나만의 퓨전이랄까.
4
혼자서 밥 먹는 것을 잘한다. 광장의 모퉁이 가게에서 맥주와 소시지를 시켜 먹기도 하고,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도 잘 들어간다. 들어가면서 혼자 먹어도 되는지를 물어본다. 혹시나 혼자 먹는 손님은 안 받을까 싶어 물어본 것인데, 거절당한 경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과 와인을 시킨다. 앉을 때 사람들이 잘 보이는 쪽으로 앉는다. 거기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저녁식사 시간을 갖는지 구경한다. 식당 주인과 포옹을 나누는 사람들, 낯선 음식을 익숙하게 먹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밥을 먹는다. 그렇게 먹으면 나도 그들의 일행인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5
여행지에서 말을 걸어오는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를 잘한다. 외국인일 때도 있고 한국인일 때도 있다. 언젠가는 스탑 오버하는 도시의 호텔에서 만난 한국인 언니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눈 적도 있다. 저녁에 항공사의 안내로 같은 호텔에서 묵게 된 우리는 근처의 슈퍼마켓에서 맥주와 주전부리를 사 가지고 와서 새벽 늦게까지 서로의 이야기를 했다. 각자의 방으로 헤어져서 두 시간쯤 자고 일어나 나보다 먼저 가는 언니를 배웅했다. 연락처를 교환하지는 않았다. 그 언니의 얼굴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언니의 얼굴과 이름을 잊어버리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니의 가방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빨간색의 크고 네모난, 무지개색 벨트가 달린 가방. 저 가방이라도 기억하고 있다면 언제 다시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되더라도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