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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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외선 차단제가 없는 열흘을 보냈다. 보통은 떨어지기 전에 미리 사두는데, 최근에 구입한 자외선차단제가 피부와 맞지 않았다. 빨갛게 반점이 올라와서 지난여름에 물놀이 용으로 사두었던 걸 대충 바르고 다녔다. 그러다 그것마저 떨어져서 올리브영에 갔다. 거기서 자외선 차단제를 사려고 몇 가지를 봤는데 가격을 보고 깜짝 놀랐다. 대부분 삼 만원 언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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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썬스크린은 한 만 원 정도 하는 것이 아니었나? 아무리 주름개선 기능이 있다기로서니, 세 배에 가까운 가격이라니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일주일 이상을 자외선차단제 없이 살다가 오늘 길거리 로드샵에서 하나 샀다. 문득 뭔가가 다 떨어져서 못 쓰고 있는 일이 무척 오래간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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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 빨래 세제가 간당간당하길래 사두었는데, 생각보다 세제가 안 떨어지고 버티고 있다. 베이킹소다도 다 써가서 새것이 대기 중이다. 식초도 지난주에 한 병 더 사두었다. 지금 떨어져 가고 있는 것은 물티슈와 설탕, 국간장 정도이다. 요즘 기억력이 감퇴했다고 생각했지만 집안에 쓰는 소모품들에 대한 현황은 눈감고도 알 수 있을 정도다. 남편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코 세척을 하는데 코 세척 약도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다. 모두 내가 떨어지기 전에 미리미리 구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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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쓰고 나서 사도 큰일나지 않는 물건들이다. 간장이나 설탕도 매일 쓰는 물건은 아니다. 그런데도 뭔가 끊어지지 않게 물자를 대려고 부지런한 나를 보니 웃기다. 되는대로 막사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이사이 엄청 집요한 면이 있달까. 결혼 후에 이런 살림살이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램(?)의 용량이 상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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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장을 보기 때문에 물건을 사려는 욕구가 거기서 다 소진되는 것 같다. 어지간하면 내 옷이나 신발 같은 물건들은 사지 않는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이토록 쇼핑 열정이 소진된 중에도 불타오르는 소비욕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원단이다. 재봉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천을 사기 시작했는데, 천은... 봐도 봐도 계속 보게 되는 매력이 있다. 언젠가 회사에서 원단을 좀 샀는데, 지나가면서 그걸 본 동료가 옷을 사냐고 물어봤다. 아뇨, 원단을 샀는데요?라고 대답하면서 나도 좀 웃겼다. 요즘 세상에 회사에서 원단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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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해가 뜨면 바를 자외선차단제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다. 역시 물건은 떨어지지 않게 채워야 제맛이지. 남편 자외선차단제가 떨어져가던데 그건 꼭 미리 사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