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파워

D-44

by Lucie

1

분리수거 통이 넘치고 또 그만큼이 한 무더기 더 있었다. 미루고 미루다 오늘은 첫 일정을 분리수거로 정했다. 나란히 트레이닝복을 입고 분리수거를 한 뒤에, 지하에 헬스장에 갔다. 여름옷 차림의 아이유가 나오는 효리네 민박을 보면서 빠르게 걸었다. 얼른 여름이 와서 저런 가벼운 옷차림으로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

휴가를 쓰면 아침부터 열정이 넘치는 것 같다. 남편은 어제부터 밀린 설거지를 하고 나는 청소기를 돌렸다. 하늘색 이불청과 베갯니를 벗겨 세탁기에 돌렸다. 창문을 열고 분홍색 린넨커버를 씌웠다. 커버 안의 리본을 요 끝에 하나하나 꼼꼼히 묶었다. 휴가는 이불커버까지 바꿀 수 있는 파워를 샘솟게 했다!


3

남편이 가장 사랑하는 맛집인 옥천 고읍 냉면으로 향했다. 집에서 옥천까지 4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와 휴가는 정말 너무 좋은 것이구나. 어디 대단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신이 났다. 옥천 근처에 가자 흰 눈이 쌓인 산 봉우리들이 우리를 맞았다. 어떤 봉우리는 무척 뾰족했다. 파라마운트 로고 같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4

쟁반에 곱게 썰려 나온 편육을 한입 베어 무니 눈 앞에서 녹색 포자가 팡 터지는 듯했다.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며 신나게 먹었다. 남편은 냉면 한 그릇을 모두 비웠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양이 적고 식탐이 없다. 어디 가서도 뭘 많이 먹는 일이 없는데 편육과 완자에 냉면까지 원샷이라니. 흔치 않은 과식이었다.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밥을 먹는 남편을 보니 나도 마음 가득 흐뭇했다.


5

오는 길에 친정집 근처에 들렀다. 네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라 학생들이 떼를 지어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평일 낮시간에 밖에 있을 때가 거의 없어서 나도 남편도 그런 풍경을 너무 오래간만에 봤다. 남편이 말했다. 다들 퇴근하나 봐요. 퇴근이 아니라고 하니까 남편은 그럼 퇴학인가? 하고 말을 받았다. 퇴학은 영원히 학교 못 가는 거예요, 하고 큭큭 웃었다. 이제 하교라는 단어를 불러오기엔 너무 오래된 기억인 걸까.


6

평소 다니던 한의원에 들렀다. 한의사는 우리의 일 년 전 증상을 줄줄 읊었다. 요즘도 소화 잘 안 되나요? 머리 아픈 건 어때요? 목 근육 긴장한 건 그대로네요. 요새는 지하철 탈 때 불안하거나 그러지 않아요? 나는 한의사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하면 되었다. 다니던 병원이라는 건 정말 마음 편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나란히 한약을 지었다. 집에 오는 길에 보름달을 보면서 가족 모두 건강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언제부턴가 소원은 항상 같다. 그저 건강하기만 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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