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7
1
어렸을 때는 학교폭력을 소재로 다루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긴급구조 119인지 경찰청 사람들인지 아니면 제3의 프로그램인지 모르겠는데, 무튼 그런 프로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걸 많이 봐서 중학교에 가면 막 일진들이 있고 누군가 나를 때리고 돈을 빼앗고 그럴 줄 알았다. 중학교에 간다는 건 정말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공격하고 돈을 빼앗으려고 하는 악의 무리의 눈길을 피하는 법에 대해서 생각했다. 가장 평범한 옷을 입고 밝고 큰 길로만 다녀야지, 그런 식의 쓸모없는 전략을 세웠던 것 같다.
2
중학교는 생각보다 평화로웠다. 간혹 볼펜 속에 담배를 숨기고 다니는 남자애들이 있었지만 그 정도가 다였다. 싸움은 여자애들 쪽이 더 화끈했다. 우리 반은 두 패로 갈려서 싸웠다. 싸우는데 우산이 쓰이기도 했다. 남자아이들은 좋은 구경 났다는 듯 말리지 않고 동그랗게 주위를 에워싸고 구경을 했다. 가끔 우리 집 전화로 반대 패거리 여자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당장 집 앞 어디 골목으로 안 나오면 혼을 내주겠다는 식의 멘트였다. 거친 욕이 섞인 말투였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 무슨 난리가 나던 집은 안전한 공간이었다. 내가 뭐하러 거길 나가.
3
사복 시범 중학교를 다닌 덕분에 교복은 고등학교에서 처음 입게 되었다. 교복을 입는다는 사실만으로 고등학교 입학은 흥미진진했다. 교복 브랜드를 이것저것 검색해보고 교복을 사러 갔다.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놀라기도 했다. 교복을 입고 학교를 가던 날의 신기했던 느낌이 떠오른다. 중학교 때까지도 치마를 거의 입지 않았기 때문에 교복 치마를 입으니 여고생이 되었다는 게 실감났다. 그때 구두도 처음 신었다. 걸으면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신발을 신고 학교 가는 일은 리드미컬하게 신나는 일이었다.
4
여자끼리만 있는 집단은 남녀공학보다 훠얼씬 평화로운 곳이었다. 일단 적어도 내 남친을 감히 니가 건드려?라는 주제의 싸움은 사라졌다. 서로 썸 타다가 관계 틀어질 일도 없었다. 여자 아이들끼리는 더 친하고 덜 친하고가 있을 뿐 별로 다투지 않았다. 학교가 마음에 들어서 학생회에 들어갔다. 야망 있는 애들이 많았지만 대체로 반듯하고 착했다. 고작 한 살 밖에 차이 안 나는 선배 언니들은 관대하고 따듯하게 우리를 대해주었다. 그때 선배들은 지금 만나도 뭔가 대단히 의지가 되는 느낌이 든다.
5
길가를 지나가다 본 학교 대문들마다 신입생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도 저런 예쁜 현수막이 걸렸을까. 아 일단 나 국민학교 입학했지... 어렸을 때 까마득하게 높았던 운동장 구령대를 나중에 보고 너무 낮아서 깜짝 놀랐던 것이 생각난다. 중학교 때까지도 늘 맨 앞 줄에 앉았던 내가 본 그때의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커다랗고 높은 것이었겠지. 그때로부터 고작 50센티쯤 밖에 안 자랐으면서 와 생각보다 작아, 생각보다 낮아, 이런 식으로 만만하게 여기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6
새로운 시작이 왕왕 일어나는 봄이 시작되고 있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매일이 반복되는 생활도 십 년째지만 그래도 봄이니까 설레고 싶다. 갑자기 두 배로 불어난 팀에서는 뭔가 재밌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팀원이 여섯 명이니 이제 워크숍 가서 편 먹고 게임해도 되겠다며 신나서 깔깔거렸다. 올봄에는 기억에 오래 남을만한 추억을 많이 쌓아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