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D-48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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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갖는 힘은 맹목적이다. 살아있는 것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선인장은 물이 없는 사막에도 적응했고, 뽑힌 잡초는 뿌리가 흙에 닿아있기만 해도 산다. 우리 집에 있는 이름 모를 초록 풀도 꺾어서 물에 꽂은 것이다. 그 꺾인 줄기에서 뿌리가 돋고 그렇게 또 자라나간다. 흙에 심긴 바질은 며칠 못 살고 죽어나갔는데, 물구덩이에 꽂힌 저 초록은 슬금슬금 우리 집에 하나의 생명으로 자리를 잡았다.


2

간혹 사람들을 볼 때도 그런 생각을 한다. 어쩜 이렇게 한결 같이 열심인걸까. 더 잘 살기 위해서 열심이고, 더 갖기 위해서 열심이고, 미래에 닥쳐올 불행에 대비하기 위해서 열심이다. 오늘 하루 게을러진 내 패턴을 다잡고 짬짬이 되는 일에 집중해가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 팀의 대부분이 업무시간에는 항상 바쁘다. 나도 그 흐름에 익숙해져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왔다.


3

그런 중에도 몇 가지 대화들이 기억에 남는다. 바쁜 팀원을 대신에 그가 바쁘다고 말해주니 돌아온 말. 그거 바쁜 거 지나가고 나면 엄청 허무할걸. 커피 마실래? 어떤 사람은 작년 말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전에는 집에 설 추석 딱 두 번 갔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매주 가고 있어요. 도배를 하려고 계획하고 있어요. 더 잘 살아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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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니 택배가 두 개 와있다. 하나는 남편과 나의 한약. 하나는 곧 있을 마라톤 티셔츠였다. 마라톤 코스는 올림픽공원부터 잠실운동장까지였다. 길을 모르면 차라리 낫겠는데, 익숙한 동네들이라서 거리에 대한 감이 온다. 그 거리를 뛰어서 움직여야 한다니, 뭔가 미션 임파서블에 도전하는 느낌이 든다. 한약을 따듯하게 데워 마시면서 절반은 뛸 수 있겠지, 생각해 본다. 이제 믿을 것은 보약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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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는 있는 줄도 몰랐던 심장이 일 킬로만 뛰어도 벌컥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할 것이다. 숨이 차면 내 기도의 모양이 느껴질 거고, 너무 힘들면 침을 흘리면서 뛰게 될지도 모른다. 격한 운동을 평소 거의 하지 않는 탓에 내가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잊을 정도다. 지난 주말엔 꽉 막힌 차들 사이로 유유히 걸으면서, 걷는다는 건 얼마나 멋진 운전인가 생각했다. 나는 아주 가볍게 전진, 후진,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다. 아주 좁은 길도 얼마든지 통과할 수 있고, 가장 좋은 건 주차공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걷기라는 운전을 택하면 나는 아주 자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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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다가올 격한 신체활동을 앞두고, 나에게 몸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새삼 자각 중이다. 그리고 십 킬로를 움직이고 나면 다음 날 다리를 못쓰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엄습한다. 그래도 날씨만 좀 따듯하다면 아주 뛰는 맛이 날 것 같다. 심장이 벌컥벌컥 거리다 목젖까지 올라오면 그때부터는 걸어야겠다. 매일 머리 쓰고 감정만 열심히 소진하다가, 팔다리를 쓰는 활동을 계획하니 특별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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