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9
1
어렸을 때는 거짓말을 참 많이 했다. 국자 망가진다고 뽑기 금지령이 떨어졌는데 엄마 몰래 숟가락에 뽑기를 해먹기도 했다. 아 엄마가 먹지 말라는 프림에도 간혹 손을 댔다. 프림 통에 티스푼을 크게 휘둘러 입안에 털어 넣으면 행복한 맛이 났다. 문밖의 인기척에 귀 기울이다 엄마가 들어오면 잽싸게 만화책을 감추었다. 고삼 때 엄마 몰래 남자친구도 사귀었다. 어 왜 거짓말의 대상이 다 엄마지.
2
스무 살이 넘으니 술도 마실 수 있고 귀가 시간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돈을 벌기 시작하자 더 이상의 잔소리는 모두 사라졌다. 부모님에게 거짓말할 필요가 없게 되니 그 이후로는 정말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나는 한 번 뱉은 말은 꼭 지키는 사람으로 언제 한 번 밥을 먹자는 말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 정말 같이 밥 먹고 싶은 사람에게만 그렇게 말한다. 누군가 나의 의견을 물으면 솔직하게 대답한다. 팩트폭행을 한다는 소리를 잘 듣는 이유기도 하다.
3
어떤 상황에도 거짓말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지만, 그런 내 신념이 굴복하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이직이었다. 이직을 하려면 다니던 회사 몰라 지원서를 쓰고 면접을 보게 된다. 합격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다니던 회사에 면접 보기 위해서 휴가를 쓴다고 할 수는 없었다. 급하게 휴가를 내려면 갑자기 아프다고 하는 것 밖엔 답이 안 나왔다. 면접 전날까지 뻔뻔히 회사를 잘 나가다가 면접날 아침에 급하게 아프니 병원에 들렀다 오후에 출근하겠다는 거짓말을 했다.
4
예쁘게 화장하고 옷도 신경 써서 입고 면접을 봤다. 판교부터 일산까지 이동하면서 화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볼연지와 립스틱이 없으면 얼굴에 붉은기라고는 없는 편이라, 창백한 내 얼굴을 보고 사람들이 괜찮냐며 걱정을 해주었다. 원래 창백한 얼굴에 감사하면서, 아프지 않은데 걱정 끼치고 있는 상황의 불편함을 조용히 견뎠다.
5
사람들끼리 이직 면접 에피소드를 늘어놓다가, 멀쩡한 아버지를 보내버린 사람도 봤다. 도저히 휴가를 쓸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다들 빵 터졌다. 야 아버지가 사고당하셨다고 하면 사람들이 엄청 놀랄 거 아냐,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치냐. 가볍게 핀잔했지만 오죽하면 그런 거짓말까지 쳐야 했을까 싶기도 했다.
6
진지함으로 무장한 나지만, 그래도 앞으로도 종종 거짓말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다. 조카에게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가져다줄 거라는 말도 하게 되겠지. 누군가의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위해서 거짓말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반드시 이유가 있는 거짓말만 하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 수 있는 그런 끝까지 거짓이 아닌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이가 들면 선물을 주는 산타는 엄마라는 걸 알게 되고, 서프라이즈의 순간 그 앞의 일이 모두 장난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