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는 됐어요

D-52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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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영화를 한 편 봤다. 지난주에 닥터 스트레인저를 재밌게 봐서 오늘은 스파이더맨을 선택했다. 이 영화는 어벤저스가 지구를 구하면서 일어난 재난 복구 현장에서부터 시작한다.


2

난장판이 된 현장을 철거하는 철거 반장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기업 사람들로부터 일감을 빼앗긴다. 이 일을 제대로 해보려고 트럭도 새로 산 참이었다. 이렇게 일자리를 빼앗긴 가장은 악당의 길로 빠진다. 생각해보면 앤트맨의 주인공도 억울하게 감옥에 갔다가 전과자라는 이유로 취업이 안돼서 고생을 한다. 인간에게 돈을 벌면서 사회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역할을 박탈한다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다. 사람을 괴물로 바꿔버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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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검지와 새끼손가락을 치켜들고 거미줄을 쏘는 시늉을 해보았다. 피융피융 입으로 소리를 내다가 문득 나에게 지구를 구하는 급의 초능력이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그럼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모른다고 해도 기꺼이 인류를 돕기 위해 나설 것인가. 잘 모르겠다. 닥터 스트레인저는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를 모른다. 이미 모두 죽었던 현실을 돌려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냈지만 돌려놓은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었던 것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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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나는 초능력을 가진 영웅보다는 아무 영문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기를 바랄 것 같다. 많은 사람의 운명을 짊어진 사람은 되고 싶지 않은데. 그런 면에서 회사 경영자들은 히어로 같은 면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경영자는 자신의 의사결정으로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 그들도 아마 무거운 어깨를 이끌고 살아가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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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도 슬슬 과장이 되어가는 나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회사를 만들어 사장이 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인생 무게까지 감당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어떤 책임감일까 상상해 본다. 또 나는 앞으로 그런 방식으로 무게를 지고 가게 될까. 아니면 조직장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남편처럼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될까. 문득 그런 미래에 대해서도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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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 영화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영웅은 없지만 현실에도 영웅은 있다. 늘 변함없이 신뢰와 지지를 보내주는 동료들. 간혹 만나면 배꼽을 잡게 웃기는 친구. 언제라도 내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뚝딱 차려내 주는 엄마. 눈이 마주치면 뽀뽀를 퍼부어주는 남편. 내 일상 속에 있는 어벤저스들이 오래오래 나라는 세계를 구원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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