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54
1
어렸을 때 한지붕 세 가족이라는 드라마 단역으로 출연했다. 내 역할은 골목길에서 또래와 함께 고무줄 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세트장을 가보게 되었다. 골목길 양 옆의 담장은 가짜였다. 겉은 콘크리트처럼 보이지만 손으로 치면 속이 텅 빈 느낌이 났다. 세트 장에는 골목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디오 가게도 있고 집도 있었다. 비디오 가게에 꽂혀있는 비디오들이 죄다 곽만 있고 비디오는 들어이지 않았다. 얼핏 보면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들 천지가 너무 신기해서 이것저것 들여다보고 만져보고 했던 기억이 난다.
2
엄마의 바다라는 드라마 단역 출연 때는 더 재밌었다. 나는 하교하는 학생 역할이었다. 교문을 나서면서 '엄마!'라고 외치는 대사 한 단어가 있었다. 긴 파마머리를 한 아주머니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내가 오늘 네 엄마란다. 카메라가 돌면 나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엄마를 외치며 모르는 아주머니를 향해 뛰었다.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데 몰입하는 것이 그때 내가 생각한 연기였던 것 같다.
3
커서는 방송제작센터에서 일하게 되었다. 어려서는 몰랐던 것들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평일 아침이나 저녁 드라마는 저예산이라 그런지 스튜디오 촬영이 많다. 덕분에 일일연속극 출연하는 분들은 출근하는 것처럼 제작센터에 나온다. 나도 그들도 회사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비정규직이었다. 제작을 담당하는 피디는 작은 나라의 왕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음악방송을 촬영하는 감독님들은 아이돌 그룹의 얼굴과 이름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4
어쩌다 촬영하는 세트를 방문하기도 했다. 업무 때문에 스튜디오에 들어가야 했는데 마침 촬영 중인 경우다. 마이크에 소리가 들리지 않게 살금살금 들어가서 뭔가를 확인했다. 그때 문득 연기자들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듣게 되었다. 직접 들으면 생각보다 약간은 오버스러운 느낌이 있다. 저런 호흡으로 대사를 해야 실제로 텔레비전에 나올 때 자연스럽게 느끼는 거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다.
5
언젠가 퇴근길에 회사 건물 복도가 막혀서 돌아서 집에 간 적이 있었다. 그날 저녁 10시에 마지막회 방송인 드라마 <야왕>이었다. 오늘 밤 10시 마지막회인데 지금 촬영 중이라고? 얼마나 다급한 촬영일까 싶어 불평 없이 얌전히 다른 길로 돌아서 퇴근을 했다. 제작센터에서 근무하는 동안 어떤 날은 회사 로비가 병원이 되어 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검찰청이기도 하고, 어떤 날은 법원이기도 했다. 설정마다 깨알같이 벽이며 바닥에 붙은 서로 다른 이정표들을 보면서 내가 재미로 보는 드라마에 어떤 사람들은 혼신의 힘을 쏟아 넣고 있구나, 싶었다.
6
제작센터에서는 일 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거기서 일한 뒤로는 방송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뉴스를 볼 때도 세트가 보이고, 드라마 속 PPL, 실외인 듯 태양광인 척하고 있는 조명 등등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제일 자신 있으세요, 라는 질문에 병원 세트는 이제 정말 자신 있다고 했던 동료가 생각난다. 문을 열면 심장과 간, 사람 머리가 굴러다니는 특수분장실도 이제는 추억이 되었다. 어렵게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전문성에 걸맞는 대우를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