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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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다 보면 자제력을 잃는 편이다. 누구나 역사 속 술주정 에피소드가 하나쯤 있듯이 나도 그렇다. 술에 와장창 취해서 술 제일 잘 마시는 앞에 찾아가 술을 권한 흑역사도 있고, 친구의 짝사랑을 폭로해 버린 적도 있었다. 그런 때에는 대개 필름이 끊겨 있기 때문에,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잘 모른다. 다음 날 나의 만행을 듣거나, 드문드문 기억이 날 때 과거의 나와 분리되는 느낌이 든다. 현재의 나는 기억이 연결되지 않는 과거의 나와 완전히 분리되어 그녀를 원망한다. 도대체 너 왜 그런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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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들이 종종 있다 보니 술을 마실 때면 늘 주의하는 편이다. 술을 마시다 보면 지금쯤 혹시 필름이 끊기는 거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 내가 필름이 끊겼을까? 하고 나에게 자문할 때는 기억이 또렷하다. 아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아직은 필름 있을 거야, 하고 정신을 차려본다. 하지만 그러다가 필름이 끊긴다. 기억나지 않는 과거에서 몇 번이나 지금 필름이 끊긴 것일지 더 자문했을지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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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건 필름이 없는 상태에서도 의외의 이성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술에 왕창 취해서 집에 왔는데 내가 화장실에서 한참 나오지 않아서 엄마가 나를 불렀다고 한다. 치마의 잠그는 단추가 복잡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을 입는다고 취한 몸을 가누며 씨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가 집에서는 대충 나와도 된다고 말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며 계속 옷과 씨름을 했다고 한다. 한 번은 필름이 끊긴 채로 친구에게 고백을 받은 적도 있었는데 내가 그 친구의 고백을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걸 전혀 기억하지 못해서 그 친구에게 못할 짓을 시켰다. 본인이 어떻게 거절당했는지 나에게 다시 설명해야 했던 친구에게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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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먹고 실수하는 일을 십 년 동안 반복했더니, 이제 훈련이 되어서 더 이상 많이 마시지 않게 되었다. 최근 몇 년간은 필름이 끊긴 적이 없다. 밥을 줄 때마다 종을 쳤더니 종만 쳐도 침을 흘렸다는 파블로브의 개처럼, 술 먹고 숙취에 시달린 십 년을 겪어서 드디어 술은 숙취를 부른다는 것을 체득하게 된 것이다. 어느 정도 마시다 보면 더 마시면 미래의 내가 불행해질 것이라는 감이 온다. 한 잔 더 마실 거냐는 제안에 고개를 젓게 되기까지 십 년이 걸렸다. 나는 이제 나를 위한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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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잔. 그것만 안 마시면 되는 일이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그것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나를 막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단 한 잔만 덜 마시면 되는 일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물론 필름이 끊긴 뒤에 마신 술이 그 뒤에 얼마나 많은 양인지 알 수 없지만, 기억이 있는 나에서 기억이 없는 나로 넘어가는 술은 딱 한 잔이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극복하고 싶은 내 모습들도 어쩌면 굉장히 얄팍한 차이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걸 깨달아 나가는 데는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