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방 속에는

D-58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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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에는 늘 약이 들어있었다. 병원에서 주는 약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치료를 위해서 복용하는 약과 갑자기 패닉이 왔을 때 먹는 약. 둘 중에 후자, 갑자기 패닉을 대비한 약이 늘 내 가방 속에 들어있었다. 그 약을 먹은 적은 서너 번이 전부인 것 같다. 그런데도 그 약이 없으면 지하철도 비행기도 탈 수가 없었다. 그 약이 없으면 나는 믿을 것이 없었다. 기댈 곳 없는 심장은 쉽게 질주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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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그 약은 내 가방 속에 없다. 나는 가방 속 파우치에 곱게 접힌 지퍼백에 든 하얀 물체를 찾아냈다. 이 약을 도대체 작년에 받은 건지 재작년에 받은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병원에 갈 때마다 약을 받았는데 정작 그만큼 다 먹지는 않아서 어떤 약이 더 최근 것인지 알 길도 없었다. 나는 약을 가방에서 꺼냈다. 이제는 약봉지가 가방에 없어도 지하철을 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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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에 간혹 물이 가방에 담겼다. 물은 없어도 간단히 편의점이나 지하철 자판기에서 살 수 있었다. 더 이상 처방을 위해서 병원까지 않아도 나는 간단하게 나의 심리적 구원템을 준비할 수 있다. 비행기를 탈 때도 라운지에 들러 생수 한 병을 가방에 넣으면 준비 완료다. 나는 점점 덜 번거롭게 살아나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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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진정제를 받았을 때 의사는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이건 먹을수록 내성이 되어서 처음에는 두 알로 듣던 것이 세 알이 되고, 네 알이 된다는 것이었다. 자주 복용하면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알약을 입안에 털어 넣게 되는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최소한만 복용하라고 했다. 그 말이 너무 무서워서 심장이 두근거려도 약을 먹을까 말까 손에 꺼내 쥐고 망설였던 일이 생각난다. 결국 나는 그렇게 털어 넣을 일 없이 약에 의지하지 않게 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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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방 속에 항상 들어있는 것이 뭘까 다시 가방을 봤다. 늘 들어있는 물건이 뭔지 한눈에 들어온다. 사원증이다. 가방을 바꾸지 않기 때문에 사원증은 주말에도 가방 속에 있다.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는 물건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문을 열고 닫으려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없으면 바로 이동에 불편이 생긴다. 그래서 늘 가방에 같은 주머니에 들어있다. 주말까지 내 가방 속에 동반하는 가장 확실한 물건이 사원증이라는 게 재밌다. 이토록 늘 회사원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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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늘 함께 하는 물건이 약이 아닌 다른 것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 년 뒤에는 사원증이 아닌 또 다른 무엇이 가방 속에서 늘 나와 함께할 거라고 믿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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