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63
1
엄마는 늘 화분을 키웠다. 나는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 가장 큰 벤자민 나무에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몄다. 벤자민 나뭇가지는 가늘고 매끈했다. 그중 버틸만한 가지에 루돌프 얼굴이나 천사, 빨강 방울을 달면서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어떤 집에 이사 가든 거실의 가장 창가 가까운 자리에 화분이 자리 잡았다. 거의 죽어가는 식물을 가져온 뒤 멋들어진 나무로 키워내는 것이 엄마가 잘 하는 일 중 하나였다.
2
집에는 초록이 있어야 돼. 엄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에게 물에 담긴 작은 초록잎을 건넸다. 그 물화분은 우리 집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초록이다. 벽의 중간까지 길게 늘어 떨어진 초록잎이 지금도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다. 그 화분 말고도 몇 개의 허브가 우리 집에 왔었다. 따서 음식에 넣어먹을 수 있는 허브들이었다. 그 화분들은 집에 오자마자 시름시름 앓았다. 얇은 거미줄이 끼고 작은 벌레들이 꼬였다. 우리 집엔 벌레가 없는데 이 벌레들은 어디서 온 걸까 기겁을 했다.
3
그 벌레들은 화분 속에 흙에 있다고 했다. 통기가 안되면 생기는데, 우리 집이 작은 평수의 오피스텔이고 늘 문이 꼭꼭 닫혀있는 것이 문제였다. 베란다에 내놓고 살아나길 기대했지만 한 번 생긴 벌레는 잘 잦아들지 않았다. 내놓고 물주는 것을 깜빡하기도 하는 바람에 가망 없이 시들어 죽었다. 어느 날 화원에서 블루베리 나무를 파는 것을 보았는데 나무 모양도 예쁘고 열매도 먹을 수 있어서 무척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가망이 없었다. 한철 베란다에서 버티더라도 겨울이 오면 들여놓아야 하는데, 또 공기 안 통하는 곳에서 죽고 말 것이다. 결국 블루베리 나무 키우기에는 도전하지 못했다.
4
문득 나는 내가 식물을 키우려고 한다는 데 놀랐다. 나는 평소에 식물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 죽어가는 식물을 애지중지 돌보고 살려내는 엄마를 늘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내가 화분을 키우려고 하다니?? 이것은 엄마가 나에게 심은 세뇌인가, 하는 생각을 잠깐 해봤다. 세뇌인지 각성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식물을 키울 수 있는 컨디션의 집에 살고 싶다는 희망사항을 갖게 되었다.
5
효리네 민박을 보면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하게 된다. 내가 먹을 것을 집 앞에 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내가 좋아하는 꽃씨를 뿌리면 오랫동안 꽃을 감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기 다른 계절에 피는 꽃을 심으면 계절마다 꽃을 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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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냉이나 달래를 넣은 된장국을 자주 끓인다. 봄나물을 국에 넣으면 보글보글하는 소리와 함께 봄나물 향이 집안 가득 퍼진다. 그 향이 퍼지면 집안에 사람 사는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짜 봄이 온 것 같기도 한 느낌이 든다. 나중에 봄나물이 마당에 자라기도 하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 왜 나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전원생활을 꿈꾸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