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재난

D-67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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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다음 주인데, 마음이 벌써 콩밭에 가있다. 어떻게 해야 휴가 공백을 메울 수 있을지, 다음 주 업무 계획에 마음속이 바쁘다. 날씨가 풀리자마자 도착한 미세먼지 때문에 여기를 잠시나마 떠날 수 있다는 게 기쁘다. 매일 고정된 곳으로 출근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봄에는 공기 좋은 나라로 잠깐 떠나도 좋을 것이다.


2

전에 회사 동료가 겨울에 육아휴직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자녀가 두 명인 분이었는데 아이들이 기관지가 약하다고 했다. 겨울에는 기관지 관련 질병이 잦아서 잠깐 괌에 가려고 육아휴직을 한다고 했다. 괌에는 자녀의 호흡기 질환 때문에 가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도 알려주었다. 부모가 노력하면 아이에게 겨울을 없애 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거주지를 떠나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3

유럽에서 스냅사진을 찍으려고 알아보면 현지에서 사진을 찍어주는 한국인 작가들이 꽤 있다. 파리나 런던 같이 한국인이 많이 가는 관광지에는 더 많다. 그런 작가들을 찾다 보면 이 작가들이 한 지역에 계속 정착하는 게 아니라 도시를 돌면서 찍는 경우도 종종 있다. 카메라와 기술이 있으면 어느 도시든 가서 일할 수 있다는 게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4

IT업계에는 이미 사무실 없는 회사들도 여럿 등장한 상태다. 깃랩처럼 전 세계에 구성원을 둔 회사도 사무실이 없다. 우리 팀에서 인턴을 했던 친구도 미국에서 일을 했는데 재택근무였다. 며칠 밤을 새워서 일을 하고 친구들과 놀러 가기도 하고, 친구들과 놀다가도 필요한 시간에 노트북을 펴서 미팅을 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사이트는 디지털 노마드에게 추천하는 도시를 랭킹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물가가 싸고, 인터넷 연결이 잘되는 곳들이 높은 순위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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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얼마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일하는데 물리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킹스맨에서는 전 세계의 요원들이 온라인으로 접속해서 회의를 한다. 접속만 한다면 그들은 한 테이블에 앉아 각자의 잔을 들어 함께 부딪힐 수 있다. 그 정도가 되면 정말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서 일한다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증강현실 게임을 실제로 해본 적은 없지만 그 안에 환경이 사무실로 세팅되어 있다면 앉아서 일할 수도 있지 않을까. 현실의 나는 파자마를 입어도 증강현실에서는 잘 차려입은 상태일 수도 있을 것이다. 화장품 알러지가 있는 사람도 화장을 할 수도 있겠네.


6

일을 내가 원하는 환경에서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일단 봄에 잠깐만 이라도 답답한 먼지의 도시에서 탈출하고 싶다. 오늘은 날씨가 퍽 더워서 창문을 열고 싶었는데. 창문을 열 엄두가 안 날 정도로 밖이 뿌얘서 옷을 더 얇게 입고 버텼다. 그리고 집에서 영화를 보는데 긴급재난문자가 두 번이나 왔다. 미세먼지 관련 재난문자였다. 정말 재난이다 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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