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78
1
저녁을 먹으면서 사람들이랑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뭔가를 하러 가는 허들, 딱 거기까지만 가도 좋은 것 같다는 이야기. 예를 들어 그냥 책을 펼치는 것, 운동을 하려고 일어난 것, 글을 쓰려고 화면을 열고 커서를 띄운 것. 딱 거기까지만 가도 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백 일 글쓰기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사실은 백일 동안 글을 쓰기 위해서 자세를 잡고 앉는 것, 거기까지만 인증하는 프로젝트를 해도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나눴다.
2
글을 쓰려고 앉으면 아무리 생각해도 쓸말이 한 단어도 생각나지 않는 날이 있다는 이야기도 누군가 꺼냈다. 그런 날이 바로 오늘 저녁일 줄이야. 뭔가 딱히 쓰고 싶은 내용이 없어서 노트북을 펴놓고 흰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사탕을 두 개를 먹었다. 사탕은 달고 시었다. 달다 시다를 반복하는 사탕을 입안에서 데굴데굴 굴리면서도 나는 오늘 쓸 내용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굴러가야할 생각은 안 굴러가고 사탕만 굴러가네.
3
정말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사람에게 늘 내가 제안하던 비법이 있다. 오늘은 정말 글이 써지지 않는다, 로 시작하는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해왔기 때문에 오늘은 그걸 실천해보고 있다. 말만 하고 행동은 안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으니까.
4
오늘은 유난히 여러가지 일이 많은 날이었다. 아침에는 외부사람과 미팅을 했다. 점심에는 글쓰기 수업을 들었고 오후에는 퇴사한다는 사람도 만났다. 일년동안 못본 선배가 갑자기 판교에 와서 나를 보고 갔다. 여러해 동안 알고지낸 회사 지인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저녁에는 회사 근처에서 약속도 있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오늘의 감정선을 다 써버린 것일까. 뭔가를 쓰려면 주제를 잡아야 하는데 어떤 것으로도 선호가 작용하지 않는다.
5
선호를 관장하는 뇌는 따로 있다고 한다. 언젠가 뇌수술을 한 이후에 정상적 사고는 가능했으나 선호가 사라져서 인생이 곤란에 빠진 사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다음 진료는 언제 받으시겠습니까, 하고 물으면 저는 다음주 월화수에 됩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럼 월화수 중에 하루를 정해주세요, 하면 정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자신의 스케줄과 비는 시간 등을 처리할 수는 있지만 가능한 시간들 중에서 좋은 때를 정하는 것은 선호의 영역이다. 그 사람은 뇌수술 후에 회사에서 잘리고, 이혼도 당했다고 했다.
6
오늘은 그런 쪽의 기능이 고장난 날인가보다, 하고 생각한다.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거지. 백일의 글쓰기 중에 주제가 생각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다는 게 말이 안되지. 그렇게 생각하니 그냥 그러려니 싶다. 내가 AI가 아니고 사람이라는 증거를 남긴 것 같다. 그래도 이렇게 글이 안 써진다는 푸념으로 여섯 문단이나 써내려 가다니. 역시 나는 수다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