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살아간다는 것

D-82

by Lucie

1

모두의 시작은 다 같지 않을까. 일단은 태어났으니까 산다. 태어나는 건 내 선택이 아니었다. 나 자신과 사물을 인식하는 법을 배워나가면서 나는 프로그래밍되었다. 땅에 떨어진 걸 집어 먹으면 안 된다. 뜨거운 것을 만지면 데인다. 단단한 것에 부딪히면 아프다. 달려오는 차를 보면 피해야 한다. 그렇게 생존에 익숙해지게끔 길러졌다. 길러졌을 뿐만 아니라 유전자에 깊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내 생존 본능이라는 것이.


2

사는 게 늘 유쾌한 건 아니라는 것은 생각보다 금방 알게 되었다. 오빠와 자주 싸우기도 하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싸우기도 했다. 머리가 커진 친구들은 싸움에 협박을 동원하기도 하고, 서로를 골탕 먹이려고 계획을 짜기도 했다. 불필요한 오해에 휘말리기도 했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진심으로 두려울 때도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들끼리도 서로 싸울 때가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화를 내지 않았는데도 마음은 수해에 쉽쓸린 마을처럼 폐허가 되었다.


3

어떻게 보면 소소한 일상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일상들 속에서 나는 사는 게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인가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한 때 자살카페가 유행을 한 적도 있었다. 한강 다리에서 얼마나 사람이 많이 죽었으면 다리에 위로의 문구가 적히기도 했다. 죽기 전에 전화를 하라고 생명의 전화도 설치되었다. 사람들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도 다양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4

몇 년 전 회식 때 누군가 죽음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진심으로 죽을까 고민했던 적 있어요? 그 질문에 대해 아니라고 말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죽는 선택지도 있다는 것을 알긴 했지만 죽으려고 고민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나를 뺀 나머지 세 명은 죽으려고 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셋 다 그 순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의 사연에 대해서 들었다. 특별히 내 상황이 더 나아 보이진 않았다. 그저 나는 약간 둔하기도 하고, 단세포적인 구석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5

힘든 일이 있어도 금방 헤헤 웃을 수 있다. 항상 어디 서너 군데쯤은 털어놓을 사람이 있다. 펑펑 울고 나면 다 별일 아니지 싶을 때도 많았다. 나는 역시 사는데 의미부여를 하는 편인 것 같다. 힘든 일로부터 멀리 달려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힘들어하는 나를 소멸시키는 것과 시간을 타고 달아나는 법. 그리고 내가 종종 쓴 임시방편이 있었는데 힘든 일로부터 잠깐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6

고개를 돌리는 방법은 유용했다. 나는 한 번도 죽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부작용이 있었는데 진짜로 내가 그 일로부터 멀어지지는 못했다는 점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면 그 일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다시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고, 작은 일에도 처음 다칠 때처럼 크게 동요했다. 그래서 결국 병이 났나 싶기도 하다.


7

그래도 살아간다는 것은 썩 괜찮은 일이다. 왜냐면 산동 안 계속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전과 똑같이 살지 않고 다른 방법을 시도해서 나에게 새로운 경험을 줄 생각이다. 새로운 삶의 방식들을 익혀나가면서 나는 더 단단해질 거라고 믿는다. 늘 인생을 먼저 산 선배들이나 부모님의 가르침을 꽤 따라서 살았지만 앞으로는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살기도 해볼 거라고, 그렇게 다짐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꿈 꾸는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