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85
1
C언니로부터 온 택배는 부슬부슬했다. 딱딱하고 노란 박스가 아니라 유연하고 투명한 비닐 포장이었다. 바스락거리는 비닐 택배를 들고 오면서 택배마저도 C언니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그스름한 볼을 가진 C언니는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었다. 컬러풀한 옷을 입었는데 색이 강렬하지는 않았다. 편안한 색의 품이 넉넉한 옷을 입었다. 그리고 뭔가 귀여운 디테일이 있는 옷과 소지품이 많았다. 어느 한구석 예쁜 수가 놓아져 있거나 예쁜 패턴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2
정말 인상적이었던 것은 회사에 수건을 갖고 다녔던 것이었다. 손을 씻고 나면 자기 자리로 돌아와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언니의 수건은 정사각형 모양의 작은 것이었는데 늘 예쁜 것이었다. 알록달록한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언니의 소지품은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었다. 한 번은 자기 립밤을 발라보라고 해서 손가락에 찍어 발라보았다. 그리고 입술에 혀를 한 번 대보라고 했다. 립밤에서 단맛이 났다.
3
회사에 다닐 때는 언니를 대리님이라고 불렀다. 그러고 보니 언니가 어느 회사에 다니다 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벌써 그렇게 옛날인가. 언니는 우리 팀에 경력직 대리로 입사를 했다. 이야기를 해보니 보통 사람들보다 느린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에 있다 와서 어떤 때는 적절한 한국어 표현을 찾는데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나는 말이 빠르고 성격도 급해서, 그럴 때 언니가 하려는 말을 먼저 짐작해서 제안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언니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응응 그거, 하고 내 단어를 차용해 주었다.
4
지금 생각하면 간혹 후회가 된다. 내가 찾아준 말이 하려던 말이 아니었을 수도 있는데, 언니에게 내 생각을 강요한 게 아닐까. 성격 좋은 언니가 그냥 끄덕끄덕 받아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나는 언니를 좋아했다. 덕분에 그 시절에 내 말투도 약간 느려졌다. 원래 말을 엄청나게 빨리하는 안 좋은 습관이 있었는데 언니 덕에 약간 느려졌다. 여전히 속사포처럼 말하지만 예전보다는 나아진 편이다.
5
일본의 큰 회사에서 우리 회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전사에 일본어 할 줄 아는 사람 수배령이 내려졌는데 그때 통역을 한 게 C언니였다. 미팅에 다녀온 본부장은 C대리가 일본말을 한국말보다 훨씬 잘한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정작 나는 언니가 일본어를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언니의 일본어 말투가 지금도 종종 궁금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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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일본어 말투는 못 들어 봤지만 오늘 언니의 일본집 주소가 적힌 택배가 왔다. 오래간만에 사람이 손으로 직접 쓴 택배 송장을 보니 정다웠다. 택배 속에서 레몬이 그려진 엽서가 나왔다. 그 시절 내 블로그 닉네임이 레몬스터였다. 레몬을 좋아했다는 걸 언니가 기억해준 걸까. 언니라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테일 왕이니까. 남편과 함께 입으라며 커플티가 들어있었다. 나는 내 옷도 잘 못 고르는데 커플티를 선물하다니 역시 언니는 센쓰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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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아기를 낳은 뒤로는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아기가 이제 벌써 무럭무럭 자라서 어린이 포스를 풍기고 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데도 결혼 선물을 챙겨서 보내준 언니에게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명동에 스쿨푸드를 처음 데려가 준 것도 언니고, 늘 만날 때마다 맛있는 걸 사주려고 하고, 정작 내가 준 건 아무것도 없는데.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담아 오늘의 일기를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