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88
1
점심때쯤 일어나 사우나를 하러 갔다. 온탕에 들어가서 앉았는데 갑자기 옆에 아주머니가 온탕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팔을 굽혔다 폈다 하면서 몸을 넣었다 뺐다 하는 통에 물이 출렁출렁거렸다. 아, 진짜 민폐다. 그만 좀 했으면. 마음속으로 불만을 품으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때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람이 아주머니를 불렀다. 저기요, 그만 좀. 출렁거려서 어지러워요. 그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어지러웠구나, 하면서 순순히 하던 행동을 멈췄다.
2
아 저렇게 하면 되는데. 나는 왜 불만만 가지고 말 안 하고 꽁하고 있었을까. 아주머니의 행동이 싫기는 했지만 딱히 그때 내 느낌이 어떤지까지는 생각 못해봤다. 그 사람은 자신이 어지럽기 때문에 그만해 달라고 요구했다. 나도 어떤 싫은 것을 마주했을 때 내 상태가 어떤지 생각해보고,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3
어른에게 싫은 것을 말하지 않는 버릇은 오래전부터 학습된 것 같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아빠는 어른에게 말대꾸를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아마 종알종알 말이 많은 나 때문에 힘들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학교에서 싫었던 거 선생님이 하는 싫은 행동에 대해서 일기장에 꼭꼭 눌러 적은 적이 있었다. 선생님 앞에서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저녁에는 내가 생각한 선생님의 불합리한 행동에 대해 적었다. 오죽하면 선생님이 보다보다 참지 못하고 방과 후에 나를 남겼다. 선생님은 말했다. 웃으면서 이렇게 앉아있는 너를 보면 일기는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아.
4
어제 봉태규가 스케치북에 나와서 그런 말을 했다. 아버지를 장지에 모시고 올라오는 휴게소에서 모르는 사람이 장난스럽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빴는데 표현하지 못했다고 했다. 연예인이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자기 기분을 표현할 수 없었고,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13년이나 쉬게 되었다고 그는 말했다.
5
내가 공황장애에 걸렸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너한테 너무 안 어울리는 병이야. 그 말을 들으면 다양한 생각이 든다. 당신을 만났을 때 내가 즐거워 보이더라도 그게 매사에 행복하단 의미는 아니야. 그리고 정신병에 걸렸다고 해서 항상 우울한 것도 아니야. 그런 삐딱한 마음이 들다가도 나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힘든 일이 있어도 절대 내색하지 않은 건 내쪽이다. 마음 아픈 일들은 어느 정도 극복되기 전까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걸 꺼내려면 말보다 눈물이 먼저 나왔다. 혹은 이제 충분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도 말하면 꼭 눈물이 함께 나오기도 했다.
6
나는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부정적인 이야기도 그저 험담이나 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방향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을 텐데. 제가 어지러우니까 당신이 그 행동을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같이 얼마든지 나에게 좋은 방향으로 요구를 할 수도 있는 건데. 그걸 몰라서 다른 사람 행동을 보면서 불평만 하고, 앞에서는 다시 웃으면서 대하고, 그러면서 병드는 건 나 자신이다.
7
유희열이 선물을 하나 주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관객들에게 핸드폰에 불을 한 번 켜주시겠어요, 하고 부탁한다. 무대에서 보면 촛불처럼 보이거든요,라고 그는 말을 이었다. 관객 모두가 불을 켰다. 유희열이 봉태규에게 이거 가수 아니면 진짜 받아보기 어려운 거예요,라고 말하고 무대를 퇴장했다. 봉태규가 노래하는 동안 관객들이 핸드폿으로 켠 촛불을 오른쪽, 왼쪽으로 흔든다. 카메라는 너울거리는 촛불과 봉태규의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민물장어의 꿈과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촛불이 만든 파도를 바라보며 노래하는 봉태규의 얼굴이 사뭇 상기되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