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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만큼 할 수 있나

D-89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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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B언니가 나에게 물은 적이 있다. 보통 내 나이쯤에 회사 다니는 사람들은 연봉이 얼마예요? B언니는 30대 후반의 박사과정생이다. 주변 친구들 중에서도 대기업을 다니는 경우가 없다. 공부를 하고 있거나 사회적 기업에서 일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언니 나이에 대기업 회사원은 어느 정도를 벌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언니는 자기가 하고 있는 공부에 만족했지만 그와 별개로 돈을 잘 못 버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있었다. 돈 벌고 스스로 앞가림하는 나를 퍽 대단하다고 치켜세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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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이와 비슷한 물음이 있다. 보통 내 나이쯤 회사 다니는 사람들은 일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걸까? 지난주와 이번주 연이어 외부 미팅을 나가면서 이런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컨설팅펌에서 나온 사람들은 퍽 전문가처럼 보였다. 그중에 나보다 어려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또 다른 회사에서 단독으로 나온 담당자도 내 나이 또래로 보였다. 담당자는 처음 보는 우리 무리를 상대로 혼자서도 척척 일을 잘 했다. 왠지 언니로 삼고 따르고 싶은 카리스마가 있는 타입이랄까. 오늘은 어쩌다 보니 건물 공사현장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우리에게 프로페셔널하게 설명을 해준 사람도 내 또래 정도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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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경제를 굴리는 근로자의 핵심축은 내 나이 또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대리말 과장초의 연차니 영 틀린 말도 아니다. 주변만 봐도 동갑내기 조직장들이 꽤 생겼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요즘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꼬라지를 들여다보면 스스로도 좀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성격이 게으른건지 매너리즘인지, 꼭 해야 하는 것들만 일정에 맞춰하고 있다. 일하면서도 이렇게 하면 좀 별로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예 몰랐으면 또 괜찮았을 텐데... 별로인 건 내가 봐도 알겠어서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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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얼마나 일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테스트해보고 싶기도 하다. 그런 상황으로 나를 몰아넣어볼까 하는 고민도 종종한다. 하지만 역시 그냥 못하는 거였다는 걸 확인하게 될까 봐 두렵기도 하고, 지금의 생활 패턴을 바꿔야 한다는 것도 장애물로 여겨진다. 오늘도 선릉역에서 지하철 탔다가 잠깐 주저앉았는데. 남편이 편하게 차로 태워주는 출퇴근길을 포기하기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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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직을 준비하는 친구가 면접을 봤다. 면접관들이 친구의 성격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일을 얼마나 할 줄 아는지를 확인하는 질문만을 쏟아냈다고 한다. 거기 들어가면 일 잘하는 또라이들만 있는 건 아니겠지, 하고 친구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런 곳에 간다면 나는 거기서 얼마나 일을 할 수 있을까. 여전히 궁금하다. 직급이 없는 회사라서 좋은 점이 훨씬 많다고 생각하지만, 이럴 때는 애매하다. 그렇다고 누군가 내가 일하는 것을 점수 매기고 등급을 부여해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일을 하면서 성장하는 기분, 내가 스스로 어느 정도 하는지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 피드백, 그런 게 아쉽다. 승진이 없는 회사에 더 다니고 싶다면 그런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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