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91
1
언젠가 스무살에 한창 썼던 일기장을 펴본 일이 있었다. 회사원이라는 옷이 몸에 편하게 맞아갈 무렵 다시 들춰본 일기장 속의 나는 퍽 낯설었다. 내가 이런 일기를 쓴 적이 있었단 말이야? 그때의 내가 지금보다 훨씬 씩씩했다. 무엇보다도 그때의 나는 나 스스로를 더 믿었다. 나의 가치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확신해주고 있었다. 그 일기를 보다 엉엉 울었다. 굉장히 소중한 보물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단히 손해본 것 같은데, 그 손해봤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자책감, 그런 이상한 감정들에 휩싸였다.
2
학교 다닐 때 철학 입문을 들었다가 철학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도서관에 가서 니체에 대한 책을 다 꺼내서 뒤적이고, 유명한 근대철학자들의 이야기들을 찾아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 읽었던 내용 중에 아직도 생각나는 것이 '나'에 대한 부분이다.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철학자들의 여러 이야기들 중에 제일 설득력이 있었던 정의는 바로 이거다. '나'라는 것은 나에 대한 기억의 다발이다.
3
나는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나에 대한 기억은 내 안에 가장 많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기억하는 나보다 내가 나를 기억하는 부분이 훨씬 많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 내가 잘하고 못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쌓여 나를 만든다. 내가 지나온 수많은 시간들을 내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냉동인간이 되어 천 년 뒤로 보내져 나를 아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어도, 내가 나를 기억할 수 있다면 나는 나 자신일 것이다.
4
며칠간 싫어하는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다. 누군가는 나에게 그래도 아쉬운 사람이 더 다가가고 맞춰야 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좋은 방향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모든 말들이 다 맞는 것 같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고개가 끄덕여 지다가도 혼자가 되면 다시 내 마음이 시끄럽다. 별로 아쉬운 게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내 마음을 꾹꾹 눌러야 하는지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5
또 한 편으로는 싫어하는 마음도 나 자신이니까. 그 마음을 열심히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호불호는 오랜시간이 쌓여서 만들어진 나만의 것이다.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이 되는 저녁이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나 자신을 잃고 싶지 않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다행이다. 좀 더 자신있게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