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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매일 쓰는 일

D-93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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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백일 프로젝트를 혼자서 했다면 어땠을까. 나 혼자서 백일 동안 매일 써야지, 하고 다짐했다면? 아, 이렇게 생각해보니까 벌써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겠다. 나는 '백일 동안 매일 써야지'와 같은 계획을 세웠을 리 없다. 나는 이렇게 빡센 계획은 애당초 세우지 않는다. 게으름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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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좀 더 자주 쓰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다. 개점휴업 상태인 브런치도 마음에 걸렸다. 또 일기로라도 내 하루를 남겨 놓지 않으면 점점 더 기억을 못 하겠다 싶었다. 하루는 출근과 퇴근으로 되어 있었다. 그 사이 세세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예전 일에 대한 히스토리를 물으면 한참을 적어둔 걸 뒤져야 간신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나마 기억이 나면 다행이었다. 내가 언제 이런 걸 써놨었네,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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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백일 글쓰기도 이런 걸 내가 할 수 있을까 한참을 망설였다. 십만 원 내놓고 시작한 건데 그 돈 하나도 못 건지면 어떡하지. 그러다 급격하게 불어나는 댓글들에 왠지 마음이 쫓겨 덜컥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백 일 동안 매일 뭔가를 적었다. 쓰면 금방 마음이 드러났다. 슬플 때 좋은 척 할 수 없었고, 망했는데 성공한 사람처럼 기세 등등할 수 없었다. 그런 걸 백일 동안 쓰고 나니까 뭐랄까. 바닥을 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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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푸념해도 될 것 같다, 라는 느낌이었다. 이제 바닥을 쳤으니까 올라가야지, 하는 느낌. 그래서 백 일을 쓰고 나니 홀가분한 느낌도 들었던 것 같다. 또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서 나만 바닥 치는 거 아니네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었고. 인생, 희로애락의 롤러코스터 타다 죽는 거지, 하고 버릇처럼 말했는데 잠깐 내리막인 거 같다고 으악으악 너무 호들갑을 떤 거 아닐까 부끄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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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으로 나는 백일 간 매일 썼다는 부심을 얻을 수 있었다. 만약에 백일 중에 오십일을 썼더라도 일기 오십 개나 썼다, 라는 부심을 얻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내가 의미부여할 수 있는 일이었던 거 같다. 나를 기록하는 글이 남는 건 나에게 소중한 일이었다. 그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고 싶어서 두 번째 글쓰기 프로젝트를 또 진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부지런한 매니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매일 써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하게도 구십삼일이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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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이백 일간 매일매일 썼다는 부심을 얻게 될 것이다! 자 이제 이 부심을 갈아 넣어서 뭘 또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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