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95
1
아침부터 소소한 청소를 했다. 주말 청소는 소소하지만 결코 소소하지 않다. 한 달 넘게 비우지 않은 청소기 먼지통을 비웠다. 화장실 청소도 평소보다 조금 더 꼼꼼해진다. 타일 사이 검게 생겨난 물곰팡이 위에 락스를 묻힌 휴지를 올려놓는다.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하고 오늘은 평소보다 더 오래 창문을 열어 환기를 했다.
2
청소가 끝나고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셨다. 프렌치 프레스로 내린 묵직한 커피는 향도 맛도 최고다. 그리고 나서 남편과 거실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와 맨날 이랬으면 좋겠다, 하고 남편이 말했다. 둘 다 안식휴가 내고 매일 이렇게 있을까요? 하고 제안해 본다. 그치만 한 달 너무 빨리 가겠죠,라고 스스로 체념한다.
3
만약에 안식휴가를 쓴다면 그 휴가에도 계획이 있을 것이다. 여행을 하게 된다면 도시 간 이동하는 비행기 스케줄, 가서 봐야 하는 어떤 것들로 일정이 빼곡해지겠지. 파리 여행을 할 때가 그랬다. 파리는 여유롭게 즐기기 위해서 전체 일정 중에 5일이나 투자했다. 그런데 가고 싶은 데가 너무 많았다. 관광명소를 사흘간 무료로 들어갈 수 있는 패스를 끊은 탓도 있었다. 돌이켜봐도 다리 아프고 추웠던 기억이 많다.
4
신혼여행을 갔던 곳은 정말 작은 섬이었다. 자전거로 십오 분이면 한 바퀴를 다 돌 것 같은 섬이었다. 섬 하나가 리조트 하나였기 때문에 먹고 수영하고, 먹고 수영하고 하는 게 다였다. 나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접영을 그 섬에서 배우고 수영에 재미를 붙였다. 특별히 정해진 일정도, 꼭 가야 할 명소도 없었다. 그 섬에 머물렀던 시간은 내내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5
멍 때리는 시간만으로 힐링이 된다는 걸 깨닫는다. 누군가 인생 최고의 사치는 시간을 낭비하는 거라고 했다. 오늘도 오후 시간을 펑펑 낭비하고 에너지를 얻었다. 얻은 힘으로 웰시코기 무늬 원단을 사각사각 잘라 바느질을 했다. 해질 무렵엔 비가 온다는 핑계로 김치전도 부쳤다. 온 집안에 기름 냄새를 휘두르며 전을 부쳐 먹으니 세상 모든 시름이 사라진다. 다음 주에 하기 싫은 몇 가지 일들도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인다.
6
내년에 남편과 안식휴가를 맞춰 쓰려고 계획 중이다. 남편과 나는 안식휴가를 여행보다는 일상처럼 보내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요즘 제주도 한 달 살기가 유행하던데, 우리도 궁금한 도시에 가서 한 달을 살아보려고 한다. 매일 시간을 펑펑 쓸 수 있는 한 달을 보내면 어떤 기분이 들까. 대학졸업 이후로는 한 번도 못해본 거라서 느낌이 어떨지 감이 오지 않는다. 누군가 안식휴가 갈 때가 신혼여행보다 더 신난다고 이야기해줬었는데. 정말 그럴까. 빨리 안식휴가 가는 그 날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