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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모임

D-96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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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한비자>를 같이 읽는 모임이 있다. 이 구백쪽에 달하는 책을 같이 읽는 멤버는 다섯 명이다. 매주 읽을 분량을 정해서 읽고 한 명이 대표로 발제를 하는 방식이다. 이 모임 멤버들은 시작할 때 컨디션 체크인을 한다. 오늘 내 컨디션이 십점 만점에 몇 점인지를 말하고 왜 그런지 이유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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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모임을 시작할 때 우리는 서로를 잘 몰랐다. 처음 보는 사이도 있었다. 체크인을 하게 되자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나오게 되었다. 어떤 날은 점수가 너무 낮은 사람이 있어서 책 읽는 걸 집어치우고 고민을 들어주기도 했다. 요즘에는 한비자 모임을 하는 날이라서 컨디션 점수가 높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책 읽기 전에 잠깐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하던 모임이, 모임 자체로 서로에게 행복을 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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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 번 책을 읽는 것도 모자라서 종종 티타임을 갖기도 한다. 거기서 또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가득한다. 한참을 수다를 떨고 일어나면서, 역시 만나서 이야기하니까 스트레스 풀리고 좋다고 이야기한다. 거기서 별로 건질 게 있는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그냥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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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수다쟁이인 것은 아니다. 다섯 명 중에서 한 명은 말수가 적다. 그는 최근에 퇴사를 했다. 그가 없는 한비자 모임을 하면 우리끼리 한참 수다를 떨다가, 그가 있었어도 지금쯤 한 마디 했을 것이라며 이야기한다. 그는 말수가 적은데 잠깐 입을 열어서 우리를 빵 터뜨리는 재주가 있었다. 강렬한 한 방이 있달까. 결국 그는 퇴사한다는 사실도 아주 늦게 늦게 우리에게 알렸다. 아 제가 다음주부터는 책 모임에 못 나올 것 같은데요,라고 딱 일주일 전에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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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포함한 나머지 넷은 말이 많다. 그중 한 명은 팩력배이다. 비속어나 욕은 절대 하지 않는데, 욕보다 더 심한 팩트폭행을 시전한다. 욕을 안 하고 살 수 있냐는 질문에 그는 욕을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차라리 욕을 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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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수가 적은 그와 팩력배인 그를 뺀 나머지 셋은 눈물 시스터즈로 불린다. 이 셋은 말도 많고, 불만도 많고, 눈물도 많다. 우리들은 제각기의 개성이 있는데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셋다 만만치 않다. 목소리도 크고, 어디 가서 말싸움으로 밀릴 캐릭터도 아니고, 심지어 한 명은 유리도 깨 봤다고(?) 했는데, 웃긴 건 의외로 눈물이 많다는 점이다. 각자가 알아서 울보라고 커밍아웃하지 않았다면 아마 서로 그렇게 눈물 많은 캐릭터인 줄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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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이 모임에서 혼자 불만 대잔치를 열었다가 스스로 반성했다. 여러분 이번 주부터는 좀 더 긍정적으로 살아보겠습니다, 라며 수습하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요즘 그 대화방에 있는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곡소리가 나는 중이라서 안타깝다. 모두가 체크인할 때 8점, 9점으로 신나게 컨디션 점수를 외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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