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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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글쓰기 매니저가 내준 주제는 '첫사랑'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첫사랑에 대해서 적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제일 많이 좋아한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제일 처음 사귀어본 사람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람이 첫사랑으로 낙점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그 이야기에는 상당한 구체성이 있다. 서로에게 해준 말이나 부르던 호칭,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에 변화를 준 사건들. 그런 것들이 남아서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2
그래서 학교에 교생 선생님이 오면 그토록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는지도 모른다. 첫사랑 이야기는 거의 실패가 없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꺼내놓을 수 있는 기억이 많고, 듣는 사람도 흥미진진이다. 오늘 다른 사람이 적은 첫사랑의 이야기들도 무척 재미있었다.
3
하지만 사랑하는 남편 옆에 앉아서 첫사랑 이야기를 적는 것은 도무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건조하게 적었다. 또 남편이 나의 첫사랑 이야기를 알고 싶지 않을지도 몰라서 여기에도 적지는 않았다. 나는 남편의 첫사랑 이야기가 궁금한데, 남편은 잘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그런 걸 보니 내 첫사랑 이야기도 아마 남편은 궁금해하지 않을 것 같다.
4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첫사랑 이야기가 이토록 흥미진진한데, 결혼한 이들의 첫사랑 이야기는 수면 속으로 사라져 버리다니 무척 아깝다. 그러고 보니 엄마와 아빠에게서도 각각의 첫사랑 이야기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자식들에게도 부모의 첫사랑 이야기는 금서가 되고 마는 것이로군. 아빠의 대학생 때 일기장을 집안 어디선가 발견한 적이 있는데 거기 엄마 이름이 아닌 여자 이름들이 꽤 등장했던 기억이 난다. 흑역사를 남기지 않으려면 브런치에도 첫사랑 얘기 같은 건 남겨선 안 되는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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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첫사랑은 끝이 나있다. 끝이 있는 이야기라서 재밌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사랑이야기도 어떤 작은 결말들이 있어 재밌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면 좋겠다. 이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옆에서 열심히 모니터를 들여다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