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98
1
낮에 보타닉 가든을 통과해서 집에 가다가 발길을 멈췄다. 호숫가에 팔뚝만 한 도마뱀이 있었다. 도마뱀은 퉁퉁한 네발을 딛고 가만히 서있었다. 정오의 햇볕이 도마뱀에 닿자 등이 반짝반짝 빛났다. 만져보지 않았지만 단단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꽤 가까이 다가갔는데 도마뱀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나보다는 빠를 거라는 자신감인가. 아니면 꼬리를 뗄 수 있다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일까. 나와 도마뱀은 꽤 가까이서 거리를 유지한 채 그 자리에 몇 분 머물렀다.
2
한참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녀석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먼저 발길을 옮긴 쪽은 나였다. 가면서도 힐끔힐끔 뒤를 돌아봤다. 그 이후로 보타닉 가든을 지날 때면 호수 근처를 눈으로 훑곤 했다. 혹시 도마뱀을 또 만날 수 있을까 늘 흔적을 찾았지만, 그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비슷한 도마뱀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큰 도마뱀을 본 것은 그때가 정말 마지막이었다.
3
그 녀석을 마주한 순간 나는 순식간에 부러움을 느꼈다. 덩치에서 나오는 자신만만함. 여유로운 눈빛. 내가 호주에 잠깐 사는 외국인 노동자였기 때문일까. 이 세계의 주인처럼 보이는 그 도마뱀이 무척 부러웠다. 호주는 자외선 지수가 높다고 해서 나는 햇볕조차 마음 놓고 쬐지 못하는 처지였다. 피부암 발생률이 일 등이라고 해서 늘 자외선 차단제를 달고 사는데. 도마뱀에게는 아무것도 문제가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4
그때부터 다시 태어난다면 바로 그 도마뱀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도 볕이 좋은 날 등 피부를 뜨겁게 달구며 호숫가에 있을 것이다. 어지간한 덩치가 다가와도 도망가지 않고 여유로운 눈길을 보내줄 것이다. 정말 위급한 순간이 되면 꼬리만 잡혀준 뒤 떼 버리고 사라져야지. 쿨하지 않은가. 내 신체의 일부를 버릴 수도 있다니.
5
언젠가 돈이 많으면 뭘 하고 싶냐고 물어본 사람이 있었다. 회사 맞은편 건물 김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나는 한적한 해외로 나가서 쓰고 싶은 이야기를 적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루시에게는 시간이 필요하군요,라고 말했다. 도마뱀을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나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한창 일할 나이에 여유를 찾는다는 게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늘 갈망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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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기를 쓰는 이 공간의 이름도 그렇게 지어져 있다. 볕 쬐는 도마뱀의 일상일기.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이미 그렇게 적어놓았다. 볕 쬐는 도마뱀처럼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