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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하루 전

D-99

by Lucie

1

어렸을 때 삐라 같은 걸 주으면 가지지 말고 학교에 가지고 오세요, 그런 안내를 받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삐라는 북한 홍보 전단지 같은 거라고 했다. 북한 사람들은 풍선에 삐라를 달아서 날린다고 했다. 나는 전단지가 나풀나풀 달린 색색의 풍선을 상상했다. 그런 풍선이 있다면 재밌을 것 같아서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어쩌다 하늘에 풍선이 날아간 적은 있었지만 삐라는 본 적이 없다.


2

북한은 늘 영화 속에 있었다. 한석규가 멋지게 총을 겨누던 쉬리, 병사들이 슬프게 자신들의 이름을 적던 실미도, 장동건과 원빈이 미모를 뿌린 태극기 휘날리며. 내가 아는 북한은 그런 픽션들 속의 북한이었던 것 같다. 나는 북한이 얼마나 가난한지, 정치와 경제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심지어 한반도는 어떤 과정으로 분단이 되었는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3

처음 외국에 나갔을 때 코리안이라고 소개하면 간혹 이런 질문이 돌아오곤 했다. 노스 코리안이야, 사우스 코리안이야? 맨 처음 그 질문을 받았을 때의 생경한 느낌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뭐야, 당연히 사우스 코리안이지 그걸 왜 물어보는 거야. 그때만 해도 북한 사람은 다 가난해서 외국에도 못 나오는 줄 알았다. 그리고 뭔가 외국에 있는 북한 사람은 다 정체를 숨긴 스파이인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했었다.


4

시간이 지날수록 알게 되었다. 남한 사람에게만 북한이 안 보이는 거구나. 북한이 주적인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색안경을 끼고 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북한이면 모든 땅이 다 남한보다 북쪽일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연천이나 철원보다 개성이 더 남쪽에 있다. 금강산은 백두산 같이 저어기 어디 북쪽 끝에 있을 거 같았는데, 고성 바로 윗자락이다. 고성에서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면 금강산이 보인다. 엄마는 멀리 보이는 산자락을 가리키며 저게 금강산이라고 했다. 엄마는 북한 가봤어? 어떻게 알아? 엄마 스파이지!


5

내일은 옥류관 냉면이 판문각으로 배달 오는 날이다. 옥류관 냉면만 오는 게 아니라 김정은 위원장도 내려온다고 한다. 버트런트 러셀이라는 유명한 아저씨는 전쟁의 상흔은 삼 대에 영향을 준다고 했다. 그 말이 정말인가. 전쟁 세대를 할머니 할아버지로 둔 나에게 남북정상회담이 왜 이렇게 감동적인 건지 모르겠다. 남북정상회담한다고 감격 먹는 나 스스로가 너무 칠십 대 같아서 당황스러울 정도다. 이게 다 강산에가 '라구요' 부르면서 눈물 흘리는 걸 봐서 그런 거 같다.


6

작가 박완서가 살아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다리에 총을 맞은 오빠를 리어카에 싣고 피난길을 떠났던 그. 이 나라의 고단한 근대사 속에서 가족도 잃고 대학 입학도 포기해야 했던 그의 젊은 시절. 소설마다 가족을 잃은 아픔이 뚝뚝 묻어 나와 마음이 아팠었는데. 강산에의 부모님은 평양에 못 갔지만, 그의 아들은 평양에서 부모님에 대한 노래를 불렀다. 강산에 부모님이 북의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았다면, 그는 거기서 울지 않았을 것이다. 문득 박완서 작가의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생각이 났다. 내일 정상회담이 다음 세대에게 남겨진 상처가 치유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7

버트런트 러셀이 맞다면, 지금 한국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전쟁의 상흔이 없는 첫 세대다. 지금의 아이들과 나는 한 세대 차이지만 아주 격렬하게 차이나는 한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내가 더 늙으면 더 차이가 많이 나겠지. 나도 요즘 젊은것들은... 하면서 젊은 사람들을 비난하게 될까.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내일의 정상회담을 통해서 나도 더 치유되었으면 좋겠다. 어렸을 때 엄마는 나중에 너희가 크면 통일이 돼서 북한에 마음대로 놀러 갈 수 있게 될 거라고 했었다. 바로 한 달 전까지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요즘 세상의 변화란 한 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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