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00
1
눈을 떴는데 사방이 고요했다. 날은 밝은 것 같은데 알람은 울리지 않았다. 몇 초 동안 오늘이 토요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어제가 목요일이었다는 사실이 기억이 났다. 아 금요일이지! 시계를 보니 9시였다. 어제 알람을 아예 꺼버린 것이 생각났다. 벌떡 일어나서 샤워를 했다. 아 오늘 아침에 남북정상회담 봐야 하는데!
2
냉장고에 요구르트가 있어서 부랴부랴 그걸 꺼내서 마시면서 텔레비전을 켰다. 출근해야 하는 시간이었는데 김정은이 남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두 정상이 분계선을 고무줄처럼 퐁당퐁당 넘는 걸 보고서 집에서 출발했다. 집 앞에는 동부구치소가 있었다. 전 대통령들은 감옥에서 정상회담 소식을 듣겠구나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3
오늘은 백일 글쓰기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마지막 날 주제는 '롤링페이퍼'였다. 몇몇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도 짤막한 글을 남겨주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스무 명의 사람들과 백일 동안 글과 씨름했던 날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련했다. 사실 나는 백일 글쓰기를 또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오늘의 글을 남겨야 하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그래도 매일 사람들에게 글쓰기를 독려하고, 백 개의 일기를 쓰면서 나도 어느 지점으로 한 걸음 더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오 월에는 일정 분량의 원고를 정리해서 출판사에 보내야 한다. 책이 안될 수도 있지만, 계약이 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일단 주제가 있는 글 타래를 완성해야 한다. 너절하게 수다 떠는 건 잘하지만 정리는 못하는 탓에 그걸 어떻게 만들어 보낼지 늘 걱정이 컸다. 이제는 글이 이백 개나 있으니까 그중에 대여섯 꼭지는 갖다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는 구석이 생겼다. 어떻게든 하루 정도 붙잡고 정리하면 되겠지, 하는 안일하지만 희망적인 마음이다.
5
마지막 날이니까 뭔가 마지막 적인 멋진 걸 써야 할 것 같다는 압박이 있었다. 그러자 역시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그냥 오늘 있었던 일들이나 적자, 생각하니 다시 뚝딱 일기가 나왔다. 뭔가를 하려고 할 때 시작하기 전에 긴장부터 해버리는 버릇이 여러 일들을 망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백 번째 일기가 삼십육 번째나 오십칠 번째 글과 다를 이유가 없는데. 괜히 힘주려다 한 시간 넘게 모니터 앞에서 딴짓만 한참 했다. 심지어 어지간해서 잘 하지 않는 신규 웹툰도 뚫었다.
6
남북정상회담을 보면 거기에서 역할들을 해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너무 대단해 보인다. 공연을 하는 사람, 사열을 하는 사람, 차량 옆을 뛰어 경호하는 사람 모두가 너무 떨리고 긴장될 텐데. 실수도 안 하고, 넘어지지도 않고 어떻게 저렇게 잘하지, 다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을 하면서 나는 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충분히 준비했다면 어떤 상황이든 준비된 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 될 텐데. 부족하다는 걸 스스로가 알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순간마다 긴장하게 되는 것 같다.
7
더 많은 준비가 되면, 중요한 상황에서 긴장하지 않고 나를 보여줄 수 있게 될까. 중요한 글쓰기든,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할 때든, 상대가 누구여도, 어떤 상황이어도, 하던 대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생에 찾아올 어떤 순간을 위해서, 매일매일 나를 만들어가는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두 번째 백일 글쓰기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