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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수정하기 싫은 날의 일기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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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려고 쓰기 시작한 원고가 몇 달째 그대로다. 이 원고로 내지 디자인을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마음에 안드는데가 많다. 고치고 싶은데 도대체 어디에 칼을 대서 째야할지를 모르겠다. 그렇다고 새로 써야 할까. 모르겠다. 공황장애 이야기를 글로도, 말로도 많이 해온 탓에 이 원고에 얼만큼 적어둔 건지조차 헷갈린다. 으악. 탈고 할 수 있을까. 올해 안에 내 이름이 적힌 첫 책이 나올 수 있을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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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수정할 생각은 안들고 쓰고 싶은 새로운 이야기들만 쌓인다. 최근 <바른마음>을 읽고 있는 남편이 그런 이야기를 해줬다. 보수, 혹은 진보의 성향을 결정하는데는 유전적 요인이 무척 크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어떤 생각들이 관통되는 느낌이 들었다. 개인이 어떤 것으로부터 공포를 느끼는가, 이런 것을 결정하는데 유전적 요인이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그에 따라 가치관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유전자, 이놈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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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4만년 전쯤 멸종한 인류다. 재밌는 점은 호모 사피엔스 종과 생식이 가능했던 것 같다. 그래서 현생 인류 대부분이 3% 정도의 네안데르탈인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이 현생인류 몸 속에 있는 유전자 지도를 계속 모으면 이론적으로 약 7-80%의 네안데르탈인 유전자 복원이 가능하다고 한다. 규제의 제약이 없다면 우리는 이론적으로 네안데르탈인을 복원할 수도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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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호모 사피엔스가 발원한 지역은 아프리카 대륙이다. 초기 현생 인류는 모두 흑인과 유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인종을 분화시킨 요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점도 신기했다. 호모 종은 결국 인류의 다른 종들을 멸종시켜 단 한 종만 생존하게 되었다. 네안데르탈인은 빙하기를 견딘 지구상 가장 오랫동안 생존했던 인류라고 한다. 지구에 가장 오래 있었던 사람이 현생 인류가 아니라는 점도 재밌는 부분이다. 호모 사피엔스 집단은 인간과 짐승을 구분한다. 하지만 다른 종을 모두 멸종시킨 특정 동물종이라는 면에서 뭔가 쎄한 느낌이 드는 지점이 있다. 지금도 사피엔스는 매머드 같은 멸종 동물을 복원시키기 위한 연구를 한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을 복원하는 것은?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네안데르탈인이 다시 복원된다면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대하게 될까요? 이미 과거에 우리가 그들에게 했던 일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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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냉동인간을 만들어주는 업체들은 두 가지 옵션을 제공하고 있다. 몸전체를 얼리는 것과 머리만 얼리는 것. 머리만 해동 된 내가 미래에 인공 신체에 붙여져서 깨어난다면 '나'라는 것은 무엇일까? 혹은 신체가 없이 나의 회로만 복원되어 전자적 상태로 깨어난다면 더욱 애매해진다. 그 시스템을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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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한 천 년만 지나도 현생 인류에게 차원이 다른 변화가 찾아올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비자는 기원전에 쓰여진 책이니까 한 이천년도 더 된 책이다. 그 책은 이천년전 인간 집단의 정치나 현실 사회의 정치가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앞으로 이천 년 뒤의 인류는? 글쎄. 적어도 요즘 출판된 처세 책이 거기 적용될 일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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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를 다시 고쳐보려고 하니까 인류의 천 년 뒤를 상상하고 앉아 있는 나... 이정도로 하기가 싫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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