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일기 #1

뭐가 써지려나 해서 아무거나 써본 일기.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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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공개로 쓴 일기가 하도 없어서, 오늘은 작정하고 공개로 일기를 써야지, 하고 시작했는데. 역시나 소재는 마르고 닳도록 써댔는데도 아직도 써지는 공황장애 이야기이다. 얼마나 계속 써야 더 이상 이 이야기가 그만 나오게 될지 나도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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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에 갔던 밤이 생각났다. 이런저런 일정을 소화하느라 나는 5시쯤 되어서야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철학자의 길로 올라가는 언덕 입구에 섰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언덕에 올라가자 조명이 켜진 도시가 서서히 빛나고 있었다. 삼각대를 세워서 사진을 몇 장 찍고, 아무도 없는 벤치에 앉아서 울었다. 우는 와중에도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에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적당한 타이밍에 울기를 그만두었다. 거의 다 내려왔을 때쯤엔 해가 완전히 져서 핸드폰으로 발 앞을 비춰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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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뭐가 슬퍼서 울었는지 잘 모르겠다. 감수성의 바다를 헤엄치다가도 다시 금방 레드썬, 하고 깨어나서 돌아오는 내가 지금 생각해도 약간 웃긴다. 몇 주전 정동길에서 익수를 만나서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정신병을 앓은 적이 없는 사람들은 정신병이 신체질병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말수가 적고 침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기에 걸리면 계속 기침하고 콧물이 나는 것처럼. 하지만 정신질병은 신체질병과는 달라서 증상이 항상 나타나지는 않는다. 즉 우울증에 걸린 사람도 어떤 때엔 무척 밝고 명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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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걸어서 지하철역을 빠져나갈 수가 없어서 구급차를 불렀을 때도 그랬다. 여러 번 택시를 타러 가려고 시도했지만 열 걸음도 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역무원에게 119를 불러달라고 했다. 구급대원이 와서 들 것에 실렸다. 실려서 역을 빠져나가는데 정신이 맑아졌다. 구급차에 타니 더 멀쩡해졌고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상인이 되어 있었다. 응급실 커튼엔 피가 튀어 있었다. 양옆 침상에서는 고통으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구급차를 불렀을까, 나는 몇 분 전 나의 선택을 후회했다. 응급실엔 위급환자가 많았기 때문에 나는 한참을 병원 천장을 보며 누워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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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을 받을 때는 별 느낌이 없었다. 그냥 3번 문제의 답은 5번 공황장애입니다, 이런 정답맞추기 한 느낌. 그런데 아무 때나 뇌의 비정상 활동으로 교감신경이 극대화되는 상황을 겪으니 대체 나의 이성은 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성적으로 아무리 괜찮다고 진정시키려고 해도 불안감이 드는 순간 호르몬 작용이 일어나고, 바로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몇 년간 나는 내가 동물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아야만 했다. 물질대사의 힘은 강력했다. 이성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나는 물질대사의 노예구나, 결국 무슨 생각을 해봤자 그거 다 호르몬 작용이 아닐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도 세로토닌이나 엔돌핀의 작용이 아닐까. 호르몬 작용을 내가 생각하고 판단해온 것이라고 착각했나 보다. 그렇다면 그런 물질대사와 분리되고 싶었다. 육체에 갇힌 느낌이 들었고 그런 생각을 할 때면 극도로 갑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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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고 있다. 봄의 첫 색깔은 노랑이다. 노란 산수유가 가장 먼저 보이고 그다음 매화가 보였다. 집 앞 공기만 쐬어도 멀리 나가고 싶어 마음이 두근거리는 계절이다. 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이 어디일지 찾으며 한적한 나들이를 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공황장애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제 내가 사람이 없는 곳을 선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약을 먹지 않은지도 한 2년은 되었다. 마지막 쇼크로부터도 4년 가까이 흘렀다. 불안한 마음과도 손잡고 잘 살아가고 있다. 굳이 이런 마음과 이별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영영 이별할 수 있는 날이 자연스럽게 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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