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by Lucie

1. 어린 시절 오빠는 뭐든지 나보다 잘했다. 바이올린도 피아노도, 눈높이도 윤선생영어도, 친구를 사귀는 것도 선생님에게 예쁨 받는 것도. 나는 엄마의 관심을 더 받고 싶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빠보다 잘 해보려고 했다. 엄마가 없을 때 눈높이 답안지를 찾아 집안을 뒤졌다. 영어 단어 시험지에는 정답을 슬쩍 썼다가 지우개로 지워서 컨닝을 했다. 결과는 뻔했다. 나는 오빠보다 말썽꾸러기였다. 사고뭉치 말썽쟁이 둘째.


2. 스무 살쯤 되자 세상에 정확히 똑같은 모양의 사랑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빠가 나보다 뭔가를 잘해서 엄마가 나를 달리 사랑한 것이 아니었던 거다. 그냥 모든 사랑은 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었구나. 스물넷이 돼서 회사에 갔을 땐 처음이 갖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주변에는 워킹맘들이 많았다. 그녀들과 매일을 함께 하면서 처음 아이를 낳는다는 것, 처음 엄마라는 말을 듣고, 처음 학부모가 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관찰하게 되었다. 모든 처음들은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떨리고 있었다.


3. 개미는 2차원의 세계에서 산다고 한다. 그래서 벽을 타고 올라갈 수도 있고 천장을 기어 다닐 수도 있다. 3차원에 사는 사람 눈에는 개미가 거꾸로 매달려 걷고, 세로로 된 벽을 수직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개미는 그저 앞으로 갈 뿐이다. 개미에게는 오직 평면뿐이다.


4.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의 내가 그랬다. 오직 직선뿐이었다. 순간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좋으면 사랑한다고 말하고 화가 나면 싫은 점을 이야기했다. 그와 나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혹은 지금 나의 행동들이 연애에 어떤 결과를 불러오게 될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이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개미처럼 나아가고 있었다. 이따금 발길 닿는 데로 직진한 길들에는 과자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있어 나를 기쁘게 해주었다.


5. 두 번째는 달랐다. 좋을 때는 그 관계가 소중한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나의 감정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감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상대방의 상태에 따라서 칭찬과 격려도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별을 하게 되었을 때도 처음처럼 절망적이지 않았다. 슬픔이 지나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나는 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6. 처음 들어간 회사를 희망퇴직하고 나는 한 달가량 구직을 했다. 그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갈 회사의 재무상태였다. 관심 있는 회사가 생기면 전자공시시스템에 들어가서 재무제표를 찾아봤다. 당기의 매출과 영업이익을 보고 전기와 추이를 비교해 봤다. 그렇게 해서 내가 알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거기 적힌 숫자가 그 회사 미래의 재무건전성을 보증해 주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걸 항상 찾아봤다. 그러면서 늘 생각했다. IT회사로는 가지 않겠다고.


7. 그렇게 결연한 각오로 IT회사 안 다닐 거라고 생각하고 지금 IT회사를 삼 년째 다니고 있는 걸 보면 웃음이 난다. 두 번째 회사는 SBS에서 분사된 자회사였다. 방송국은 신기했다. 연예인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인간적이고 정 많은 선배님들이 많은 곳이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근속연수가 긴 회사의 특성 중엔 나와 맞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한 달에 한 번씩 휴가를 쓰면 첫 직장에 놀러 갔다. 그렇게 열 한 번째 휴가를 쓰고 나서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팀장님은 이직을 하겠다고 말한 사람은 니가 처음이라고 했다.


8. 두 번째라는 소재로 쓸 일기들은 아마도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두 번째 책이 있을 것이고, 두 번째 직업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처음이 없는 것들도 두 번째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두 번째 차라던가, 두 번째 창업이라던가. 둘째로 태어나서 그런지 두 번째가 주는 느낌은 어쩐지 긍정적이다. 때때로 처음보다 더 나빠지는 두 번째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더 나은 세 번째를 만들어 내면 될 일이다.


9. 두 번째는 처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특별한 순서다. 그리고 그 뒤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평범한 순서 인지도 모른다. 이 특별하고 평범한 순서의 징검다리를 밟아 지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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