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나에 대한 생각
해리포터를 보면 호그와트로 가는 마차가 나온다. 그 마차에는 말이 없다. 보이지 않는 말이 끄는 마차라고 소설은 설명한다. 하지만 해리가 가족을 잃고 나서 호그와트로 갈 때는 그 말이 보인다.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말이었던 것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겪고 나자 나에게도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항상 미래 위주로 생각했다. 지금 힘들더라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면 괜찮았다. 공황발작 이후에는 현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래에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그게 현재 나를 너무 힘들게 한다면 그만둬야 한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 출근 준비로 바쁜 나를 위해서 주로 마실 수 있는 아침식사를 준비해주었다. 나는 시간이 없으니 목젖을 열고 단숨에 그걸 마셨다. 그런데 시간을 가지고 주스를 마시면 그건 엄마만이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라는 걸 알게 된다. 엄마는 늘 제철 주스를 만들어 주었다. 토마토가 나오는 시즌에 찰토마토를 사다가 뜨거운 물에 데쳤다. 데쳐서 토마토의 얇은 껍질을 벗긴 뒤에 갈아서 한 번 끓였다. 거기에 매실액을 타서 냉장고에 하루 보관해 차갑게 만들어 주었다. 그걸 마시면 어디서도 사서 먹을 수 없는 엄마만의 주스 맛이 난다. 이런 건 역시 엄마가 있기 때문에 마실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공황장애를 겪고 나서 엄마에게 더 잘하게 되었다. 그전에는 어버이날 선물을 사더라도 부모님을 기쁘게 하면서 내가 돈을 덜 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고민을 했는데, 공황장애 이후로는 쓸 만큼 썼다. 부모님에게 쓰는 돈이 더 이상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좋은 선물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내 커리어나 미래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서 후순위로 밀렸다. 하지만 이제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만드는 것이 현재와 미래의 나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찾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다. 나는 내가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거의 사실을 돌이켜보면 나는 꼬박꼬박 학교에 다니고, 부모님이 반대한 진로를 선택하지 않았으며,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했다. 어딜 보고 나 자신을 즉흥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학교 졸업할 때쯤 극심한 소화불량에 시달렸는데, 일주일 걸러 계속 병원에 찾아오는 나에게 의사가 물었다. 운동해요? 그 말에 내가 언제 운동을 했었나 돌이켜 봤는데, 고등학교 체육시간 이후로 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다들 시간을 따로 내서 운동을 한단 말인가? 그 점이 더 신기했던 시절이 있었다.
감기에 걸리면, 감기에 걸린 사실을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먼저 알았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감기 걸렸네,라고 말해주면 그때서야 아 감기 걸렸구나 하고 알았다. 한참 기침을 하고 콧물을 흘려도 감기에 걸렸다는 지각을 못하는 류의 사람이었다. 몸이 무척 안 좋은 날에도 지하철 손잡이에 매달리듯 의지해서 출근을 했다. 출근해서 간신히 한 칸씩 엑셀을 채우는 나를 보고 사람들이 하루 쉬지 왜 출근을 했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아, 이 정도면 쉬었어야 했는데,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하고 후회를 했다.
나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 남보다도 더 몰랐다. 처음에는 공황장애에 왜 걸린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괴로웠는데 몇 년이 지나서 알게 되었다. 내가 나를 전혀 돌보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걸린 거라는 걸. 그래서 이제는 남들이 평범하게 하는 일상생활조차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조바심을 내야 한다. 그래도 그동안 나를 너무 방치했으니 이제 더 섬세하게 나를 살피는 법을 배우는 것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