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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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는 세 번째다. 내가 이 나라를 세 번이나 가게 될 줄이야. 10년 전에 브리즈번에서 일 년 살았다고 하자, 오 그럼 너 거의 호주 사람이네, 하고 호스트가 말했다. 호스트는 게이 커플이었는데 호주에서도 보기 드문 예쁜 하우스에 살고 있었다. 남자들 청소 안 하고 집도 못 꾸밀 거 같은 건 역시 편견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커다란 냉장고에는 먹을 것이 가득 있었는데 카테고리 별로 구획도 잘 되어 있고, 반찬통에 잘 썰어진 딸기나 소시지가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텅 빈 냉장고에 아무렇게나 야채며 양념이 굴러다니는 우리 집을 떠올리며 잠깐 반성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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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크리스마스는 한 여름이다. 브리즈번은 35도를 넘기는 더위로 한낮엔 호텔에 있는 게 이로웠다. 10년 전에도 같은 레스토랑 알바생들끼리 놀이동산을 갔었는데 정수리가 익어서 벗겨졌던 기억이 있다. 여름이라 북반구 사람인 우리는 반팔 크리스마스가 참 낯설었다. 그래도 여기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즐기기에 열심이다. 길가에 트리도 많고, 자기 집 테라스나 현관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놓은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우리가 묵은 에어비앤비 숙소는 리짓 스트리트 전체에서 제일 화려한 조명 장식을 해둔 곳이었다. 저녁에 들어올 때 멀리서도 현란하게 움직이는 조명으로 집을 알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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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재밌었던 건 시드니 시내를 달리는 오토바이 폭주족들이었다.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엄청 큰 소리가 났다. 계속해서 오토바이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 보니 족히 오십 명은 넘어 보였다. 시끄러워서 쳐다보니 다들 산타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닌가. 어떤 사람은 오토바이에 반짝이 전구를 둘렀고, 어떤 사람은 자기 몸까지 전구를 둘렀다. 사람 몸통만 한 트리를 뒷자리에 태운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오토바이 양 옆을 썰매 모양으로 장식한 사람도 있어서 빵 터졌다. 갈림길마다 턴 디스 웨이, 이런 팻말을 들고 선 사람들이 있는 걸 보니 잘 조직된 동호회 같았는데, 산타 코스프레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런 이벤트와 함께라면 좀 시끄러워도 함께 즐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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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트 말에 의하면 호주에서는 7월쯤에 크리스마스 시즌 기간을 갖는다고 한다. 우리 냉장고에 크리스마스 음식으로 터키랑 이런 게 있긴 한데, 그런 건 역시 겨울에 먹어야 제맛 아니겠어? 하면서 7월에 겨울이 오면 크리스마스 음식을 해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브리즈번에서도 우리가 좋아하는 옷 브랜드가 있어서 구경을 갔는데, 우리 이 브랜드 베를린에서 알았다고 아야기하니, 웅 여기는 육 개월씩 옷이 늦게 릴리즈 되고 있어,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계절이 반대인 남반구의 시간은 북반구 사람에게 늘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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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호주에 산불이 크게 났다. 호스트 말로는 유칼립투스 나무가 기름져서 온도가 높으면 자연발화가 된다고 한다. 우리가 있을 때도 바람 방향이 바뀌어 엄청난 연기가 도시를 덮었다. 뉴스를 보니 시장같이 보이는 분이 나와서 설명을 하고 질의응답을 받아 주었다. 질문에 따라 뒤에 있는 의사가 나와서 답변하기도 하고 소방관이 답변하기도 했다. 질문에 맞는 답을 할 사람들이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답변을 해주는 게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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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 가면 새로운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어서 좋다. 이방인은 사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서 어쩌면 그 무리를 더 잘 관찰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곳에 있을 때, 돌아와서도 내가 원래 속한 곳에서도 이런 시각을 유지하고 싶다는 바람이 생긴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해도 늘 출근하면 다시 무서운 속도로 똑같은 생각의 쳇바퀴에 갇힌다. 그게 싫어서 손가락이나 팔목같이 잘보이는 곳에 문신을 하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그럼 뭐라고 새기면 좋을까. 한 번만 더 생각하고 말해, 할 거면 쎄게 하고 말거면 단념하자, 왜 또 화를 내고 그래... 생각을 해보다가 다 이상한 문장들 뿐이라 체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