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뭘 하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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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에게 새해 인사를 드렸다. 교수님을 처음 만난게 2006년인데, 벌써 15년이나 지났다. 워킹맘으로 고군분투하시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아이가 벌써 고등학생이란다. 공부에 관심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다고 한다며 교수님은 자식 키우기가 너무 어렵다고 하셨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세상에 쉬운 일이 없나보다. 한편으로는 장래희망란에 아무거나 적어내던 내 학창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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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만 되어도 갖고 싶은 직업을 희망대로 가질 수 없다는 걸 다 안다. '공부를 잘 못하는데 의사, 변호사 그런 걸 어떻게 해. 연예인, 아나운서? 그건 예뻐야 할 수 있는데 일단 난 그렇게 안 태어났네. 당장 어떤 대학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직업은 대학 간다음에 고민하면 되지 않을까?' 도대체 학교에서는 왜 장래희망을 적어서 내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적당히 아무거나 적어서 제출했다. 얼마나 아무거나 적었냐면, 거기에 뭘 적었는지 지금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상상한다면 선생님 같은 거 아니였을까. 혹시 회사원 같은 걸 적지는 않았겠지. 만약 그렇다면 장래희망은 이미 달성. 훌륭한 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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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0일 동안 매일 프로그래밍 공부하는 모임에서 활동을 했다. 이 모임 형태가 외부로도 공유되면서 일부 대학에도 이 방식의 소모임이 생겨난 모양이다. 백일이 지나고 뒤풀이 할 때 대학생 몇 분이 참석을 해주셨다. 모임을 만드신 분은 의외로 전공이 경영학이라고 했다. 1전공이 경영학인데 2전공이 컴퓨터공학이고, 거의 2전공에 매진하고 계시다고 했다. 나도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터라 그 마음이 무척 이해가 되면서도 약간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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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이란 취업하고 싶은 대학생의 디폴트값이다. 나라고 경영학이 뭔줄이나 알고 그걸 선택했을까. 그저 취업이 잘되는 과고, 그래서 학점이 좋아야 선택할 수 있는 전공이라서, 그냥 했다. 경영학과 교수들은 이 전공을 제대로 알려면 인문학이나 다른 사회과학학문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했다. 경영학만 배워서는 별로 쓸모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서 지금 경영학과 전공생에게 뭘 어쩌라는 거죠 교수님. 돌이켜보면 전공수업에서 제일 많이 배운 것은 경쟁이었다. 수업에 들어온 학생들 중에 A학점을 받을 수 있는 비율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그 비율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 생각 하나만으로 수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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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나는 취업을 하긴 했다. 십 년 정도 일을 했고, 여러 회사를 거쳤다. 요새 우리팀으로 지원하는 사람들 이력서를 보면 마음이 좋지 않다. 아직 회사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냥 대학교만 다녀서는 절대 취업을 할 수 없는 건가. 그중 비교적 평범한 이력을 가진 지원자도 있었는데 면접 사전과제를 기대이상으로 수행했다. 하지만 우리팀에 뽑을 수 있는 사람 수는 한 명이었다. 모시기 과분한 지원자 여러 명을 두고 누군가를 탈락시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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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링크드인 업데이트를 해보았다. 내 이력을 남이라고 생각하고 보니,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직무가 광고 비즈니스 기획에서 인사로 바뀌었고, 최근 몇 년의 이력을 보면 데이터 분석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데이터 분석가들이 하는 파이썬으로 데이터 스크리닝을 하거나 쿼리를 날려서 데이터를 뽑은 적은 한 번도 없다. 내가 분석하는 인사 관련 데이터는 엑셀만으로도 어지간히 다 되는 양이다. 도대체 나는 뭘하는 잘하는 사람일까. 아니 뭘 하는 사람일까. 여러 회의감에 휩싸이는 경험이었다. 이력서 정리는 종종 해주는 게 큰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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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학벌의 신규입사자들이 취업하지 못하는 상황은 여러 사람에게 족쇄가 된다.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은 그만둔다면 다시 재취업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어리고 잘하는 사람들이 저렇게나 많은데, 나를 뽑아줄 회사가 있을까.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공부할 동기를 상실할 수도 있다. 서울대생도 취업이 안된다는데, 공부는 해서 뭘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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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공부한 것들을 일에 적용해볼 수 있어서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그동안 벌여온 딴짓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순간이다. 분명 ios앱개발을 하려고 시작한 공부였는데, 딴짓하던 버릇을 버리지 못해서 파이썬과 웹개발 스터디도 하게 되었다. mysql db를 만들려고 보니 이미 내 맥에 워크벤치가 깔려있었다. 하도 오만군데를 쑤시고 다녔더니 언젠가 조금씩 연결되기도 하나보다. 무척 비효율적인 학습곡선을 그렸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조금씩 쓸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지금까지 벌인 딴짓들을 가지고 나를 좀 더 심플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잘하는 일에 대해 긴 설명말고 단출한 이름표를 붙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