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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ie Mar 18. 2020

집에서 일한다는 것은

재택근무 기록

1

집에서 집중이 잘 된 적은 없었다. 덕분에 초중고 시절 시험공부 방식은 늘 벼락치기였다. 시험 전날이 아니라면 집에서 공부? 어림도 없지. 대학 때는 평일에 늘 신나게 놀았기 때문에 주말이라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는 집에서 왕복 세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그래도 반드시 주말이면 학교를 갔다. 그 세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삼십 분도 공부하지 않을게 뻔했기 때문에.


2

그런데 재택근무가 몰랐던 집중 능력을 깨우쳐 줬다. 나는 아침 열 시에 다섯 명이 있는 팀 단톡방에 출근했다고 말하고 오후 일곱 시에 퇴근한다고 신고한다. 그 사이에는 밥 먹는 시간 빼놓고 식탁에 앉아 있다. 어떤 날은 두 시, 세 시, 네 시에 각각 미팅이 있었다. 앉은자리에서 다른 미팅 url을 클릭하면, 바로 다음 미팅이다. 미팅이 끝날 때는 두 손을 들어 흔든 뒤 창을 끈다. 간혹 다른 팀원의 아이들이 방에 침입해 들어와 시키는 대로 꾸벅 인사를 하기도 하고, 붙임성 있는 고양이가 다가와 꼬리를 흔드는 모습도 보게 된다. 그 다채로운 풍경은 모두 모니터 안에서 벌어지고 나는 그 앞에서 퇴근 때까지 꼬박 일을 한다.


3

친구의 여섯 살 아이는 엄마아빠가 컴퓨터 안에서 돈을 가져온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늘 엄마아빠가 컴퓨터를 붙잡고 있고, 그러면서 돈 벌어 온다고 말하기 때문에 컴퓨터 안에서 돈을 찾아오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나 보다. 그 말이 진짜 맞는 것 같다는 실감이 나는 요즘이다. 말을 걸던 팀원들도, 가끔 근황을 공유하면서 차를 마시던 동료들도 이제는 모두 컴퓨터 안에 있다.


4

생각보다 화상 미팅에서 음성이 또렷하게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럿이 한꺼 번에 이야기하면 특히 그렇다. 또 누가 누구를 보고 말하는지도 알기 어렵다. 몇몇 사람들은 이래서 킹스맨에 나오는 VR 환경이 필요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된다면 회사라는 공간도 필요 없을 것 같다. 우리 집에서도 순식간에 모두 모여서 차를 마실 수 있는 거 아닌가. 출근 없이 화상 회의로 일하는 것이 90년대에 그렸던 미래 사회라면 2020년에 상상할 수 있는 미래 사회는 킹스맨인가.


5

집에서 요리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늘었다. 식재료 쇼핑에 평소보다 5그램 정도의 에너지를 더 쓰게 된다. 새로운 쇼핑몰에서 식재료를 주문해 보았다. 덕분에 잘 해먹지 않는 봄나물 무침도 하고, 오늘은 반찬 두 가지와 국을 끓여 새로 한 요리로만 저녁을 먹었다. 제대로 요리를 하려면 사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오래전 인간이 단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냥과 수렵에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썼던 것처럼, 제대로 먹으려면 상당한 시간을 쓸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6

식탁에 일 꾸러미를 펼친 까닭에 식사는 거실의 낮은 테이블에서 하고 있다. 식탁에 앉으면 출근, 식탁을 떠나면 퇴근이다. 매일 환기를 하는데 오늘은 문은 열어도 전혀 춥지 않을 정도로 바깥공기가 따듯했다. 출퇴근하는 사람이 사라진 거리에 봄이 오고 있다. 판교가 벚꽃 명소인데. 점심이면 오피스 건물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꽃구경을 하는 활기찬 풍경이 그립다. 회사가 지긋지긋했던 무렵에, 언젠가 회사 그만두면 여기가 그립겠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회사 그만 두기도 전에 벌써 그리워졌다. 사월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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