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4
1.
일 년 전 오늘, 나는 포지타노에 있었다. 비치 의자는 하나에 삼만 원이나 했다. 비쌌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삼만 원이 대수인가! 우리는 해변가에 내내 누워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자갈 해변을 비틀비틀 걸어 바다로 들어갔다. 뭍에서 위태로워 보였던 할머니는 물속에서 물개처럼 헤엄을 쳤다. 튜브 없이 발이 닿지 않는 먼 곳까지 헤엄쳐 갔다. 나이가 들면 땅보다 물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구나. 발 닿는 곳에서만 겨우 수영을 할 줄 아는 나에게 새로운 희망사항이 생겼다. 나도 머리가 하얗게 세었을 때 물개처럼 바다 수영을 해야지.
2
포지타노에서 다시 나폴리로 차를 몰고 나왔다. 핸드폰으로 내비게이션을 봐야 했는데 차량 거치대가 없었다. 앞 여정에서 차를 반납할 때 거치대까지 같이 반납해버린 탓이었다. 남편은 여행가방의 짐텍을 뜯어서 휴대폰을 차 앞쪽에 붙였다. 내가 팔 아프게 휴대폰을 들고 있지 않아도 된다. 어쩜 이렇게 아이디어가 반짝이는지. 면허 딴 이후로 처음 몰아보는 수동차 운전도 능숙하게 마스터한 남편의 옆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반한다.
3
두 달을 보냈던 베를린 생활은 의외로 평범했다. 노트북을 지고 나와 카페로 간다. 작년 여름은 유난히 더웠던 탓에 에어컨이 있는 단골 카페로 갔다. coffee drinks your monkey라는 재밌는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그렇게 베를린에서 트리 알고리즘을 익혔다. 한참 트리 문제를 풀다가 밥때가 되면 맛있는 베트남 음식을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4.
저녁이면 매일 다른 맥주를 사서 마셨다. 베를린 맥주, 쾰른 맥주, 터키 맥주, 유기농 맥주. 집에선 별로 할게 없어서 넷플릭스에서 히틀러 이야기가 나오는 다큐를 봤다. 베를린에서 독일 역사를 알아가는 일은 흥미로웠다. 집 앞에는 크리스털 나흐트에 희생된 유대인 이름이 새겨진 블록이 박혀있었다. 집 근처 번화가에는 일층만 불탄듯한 느낌의 건물이 있었다. 왜 일층만 검은지 궁금했는데 전후 사진을 전시한 곳에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지역이 폭격을 맞아 아무 건물도 없는 허허벌판이 된 사진을 보게 된 것이다. 그중에 밑동이 성한 건물들은 그 부분을 활용해 다시 세웠나 보다. 설마 했던 검은 벽이 진짜 전쟁의 흔적일 줄이야.
5
새로운 환경에서 석 달을 보내자 일상이 새로움으로 가득 찼다. 처음 보는 환경과 문화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휴가가 시작되자마자 가방을 싸서 떠난 과거의 나 자신을 너무 칭찬해주고 싶다. 휴가 끝에 회사가 나에게 휴가를 주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 나에게 장기휴가를 주겠다는 목표를 갖게 되었다. 생각만 해도 설레는 목표가 아닌가. 이런 목표가 있으니 나 자신에게 줄 점수가 후할 수밖에. 언젠가 또 다시 약간 무모한 선택을 할 나를 응원하면서, 오늘도 후한 점수를 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