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베네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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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로 가는 열차는 양쪽에 바다가 보이는 철길을 달린다. 8년전 나는 침대칸을 타고 여기에 왔었다. 한국에서 로마까지 12시간, 그리고 다시 바로 열차를 타고 쪽잠을 잔 나는 초췌했다. 흔들리는 화장실에서 고양이처럼 세수를 하고 나오니 열차가 바다 가운데를 달리고 있었다. 베네치아로 가는 사람들은 모두 그 순간에 마음을 빼앗긴다. 이번에도 그 순간 사람들이 감탄사들을 질러 열차가 잠시 소란해졌다.
2
스물두살의 나에게 유럽은 너무 먼 나라였다. 베네치아를 떠나면서 죽기 전에 꼭 다시 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결연한 각오였네. 서른이 되니 그렇게 어렵게 각오를 다지지 않아도 올 수 있는 곳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때의 바람이 있어서 더욱 특별한 기분이 났다. 친퀘테레에서 두 번이나 열차를 갈아타고 오느라 힘들었지만 밤 산책에 나섰다.
3
베네치아는 친퀘테레와 로마 이상으로 사람이 많았다. 그 가운데 가장 괴로운 것은 담배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어째서인지 어디서나 자유롭게 담배를 피운다. 열차 플랫폼은 물론이고 야외카페, 터널이나 지붕이 막힌 좁은 통로에서도. 사람이 바글바글한 길에서 앞서 가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면 나머지는 뒷사람이 마시면서 가는 수밖에 없다. 담배의 공격을 피하면서 다니느라 힘들었다. 흡연자가 여행을 온다면 무척 행복할만한 환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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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노와 부라노로 가는 배에도 사람이 많았다. 8년전엔 진짜 어부같은 아저씨들이 운전하고 안내해주고 했는데. 이제는 전광판에 수상버스 오는 시간이 적히고,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배에서 일한다. 8년전 숙소에서 만나 친해진 한국인들과 싸이월드 일촌을 맺었던 것까지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아 진짜 옛날인 것이다. 우리 때는 먹을게 없어서 보릿고개에 나무뿌리를 씹어먹었다는 그런 이야기를 내가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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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대미는 산마르코 광장이었다. 이 광장은 내가 여행다니면서 본 광장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광장이 큰데도 웅장한 건물이 삼면을 둘러싼 형태라 아늑하고 따듯한 느낌을 준다. 오늘은 낮에 바닷물이 넘치지 않았는지 바닥이 말라 있었다. 산 마르코 성당 앞에 바닷물 넘칠 때 깔아놓는 나무 판들이 쌓여있었다. 베네치아가 바다에 잠기지 않고 오래오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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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에 걸터 앉아 멍하니 광장을 바라봤다. 동남아에서도 많이 파는 빛나는 새총 같은 것을 사람들이 팔고 있었다. 이 광장 하나에 그걸 파는 사람들이 열명도 넘었다. 계속해서 쏘아올리는 푸른 불빛들이 굵은 눈송이처럼 천천히 떨어져 로맨틱한 풍경을 연출했다. 옛날옛날에도 이 수상도시를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여행을 왔을까. 옛날 귀족들은 여행은 고생이라고 생각하고 별장같은 것을 만들어 휴가를 즐겼다는데, 그럼 여기 별장없는 귀족은 안 왔을 것 같고. 그럼 이 아름다운 풍경은 이곳 주민과 소수의 방랑자나 탐험가들에게만 허락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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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서 베네치아의 바다와 친퀘테레의 땅 그리고 사람을 생각했다. 사람은 자기의 의지대로 움직이며 산다. 땅은 움직이지 않는 속성을 지닌다. 하지만 어떤 때는 친퀘테레의 절벽처럼 수직으로 솟아오른다. 바다가 때때로 베네치아 위로 넘쳐 오르는 것은 밀물과 썰물이라는 바다의 성질이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들은 저마다 자기의 속성대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은 그런 존재들 중 역사가 길지 않은 편일 것이다. 우주의 시간 중 인류가 가지는 시간, 그리고 그 중 나의 시간을 견주어 보면서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에게 얼마나의 시간을 꼭 어떤 방식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의무나 제약은 없다. 사람이 의지대로 행동하는 속성을 지닌 존재라면 나는 인류에 민폐없이 할 도리 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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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떠나면서 갑자기 그리움이 몰려왔다. 지나간 시간들이 거기에 있었다. 슬프지 않았는데 눈물이 나왔다. 주황전등이 켜진 긴 복도, 수 많은 관광객, 떠나는 내 발걸음이 얽혀 데자뷰 같이 느껴졌다. 20대 초반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갑자기 한꺼번에 많은 것이 떠올랐다. 이런 기분이라니 십년 뒤에 한 번 더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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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베네치아에서 비행기를 놓치지 않았다. 헐레벌떡 뛰어와 닫힌 창구를 봐야했던 그곳에서 체크인 잘하고, 이제 프랑스 리옹에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