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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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는 나에게 조금 익숙한 도시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어학연수를 간 곳이었기 때문이다. 불어불문학을 전공하던 친구는 한국 사람이 없는 곳에서 어학연수를 하기 위해서 이곳을 선택했다. 그런데 그게 독이었던지 나중엔 향수병에 시달렸다. 2007년에 친구가 살던 동네에는 동양인이 세 명밖에 없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놀리듯이 니하오, 니하오 거렸는데, 그 '니하오'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나왔다고 했다. 위로가 되는 건 밤의 새까만 호수뿐이었다고, 프랑스에서 돌아온 친구는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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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는 스위스스러움을 느끼러 가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고른 여행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알프스 산맥과 투명한 호수, 그리고 백조까지 영락없는 스위스 풍경이었다. 과거에 스위스 영토였는지 곳곳에 스위스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재밌는 점은 호수에 연결된 수로들이 도시 내로 흐르는데 그 풍경이 베네치아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베네치아로 불리기도 하는 것 같다. 프랑스 속 스위스이자 베네치아라니. 정체성 너무 모호한 것 아닌가.
3
호수와 관광지를 돌아다니는데 휠체어에 탄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노인이나 장애인이었는데 호수 주변은 물론 건물 진입로까지 휠체어 접근이 쉽게 되어 있었다. 프랑스에서도 은퇴한 부자들이 많이 산다던데 왜인지 알법했다. 우리나라에도 접근성이 보장된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시가 있으면 좋겠다. 내가 늙어서 노인이 되기 전에 생기면 참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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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오는 길에 진격의 거인을 봤는데, 안시가 진격의 거인의 배경과 무척 유사하다. 스위스나 프랑스 전통 가옥양식을 모델로 한 건가. 심지어 안시성은 성벽이 무척 높아서 월마리아를 연상시켰다. 금방이라도 거인이 튀어 나와서 사람 막 집어삼키고 할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구시가 골목은 좁고 집들은 높아서 조사병단이 입체기동무기 갖고 뛰어다니게 생겼다. 진격의 거인 덕분에 안시 구경은 두 배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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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에서 하루 반나절을 보내게 되어 마음이 여유로웠다.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서 구경도 하고 애플 매장에 가서 아이폰7도 만져봤다. 이것저것 카메라도 켜보고 했는데 디테일하게 안써봐서 뭐가 그렇게 좋아졌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홈 버튼이 물리버튼이 아니라서 눌러지지 않는 것이 생소했고 무광블랙 폰이 멋졌다. 그렇지만 천이백유로 가격에 후덜덜하며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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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확실히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나라인 걸까. 시내 중심지에 다른 국적음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이라면 스시집이며 차이니즈, 인디안, 그릭 등등 넘쳤을 것 같은데 안시는 진짜 없다. 변두리쯤 와야 케밥집이 하나 있을 정도다. 리옹보다 더 추운 날씨덕에 국물음식이 땡겼는데 마땅한 게 없어서 컵누들이랑 연어를 사들고 들어와서 와인과 함께 먹었다. 낭트 지역에서 만든 와인이었는데 맛이 좋았다. 와인을 마시니 실감이 났다, 아 여기가 프랑스가 맞긴 맞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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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침대를 굴러다니며 티비를 봤다. BBC를 봤는데 기자가 어떤 젊은 여자를 인터뷰하고 있었다. 가족 9명이 살해당하고 사촌동생들이랑 끌려가서 매일같이 돈에 팔려 강간 당했다는 이야기였다. 보는 동안 잉? 지금 2016년인데?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yazidis 라는 단어가 계속 나와서 검색을 해봤다. 이라크의 소수민족이라는데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악마를 숭배하는 민족이라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기자가 여자에게 물었다. 거기 잡혀 있는 동안 그 남자들과 평범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는가? 여자가 대답했다. 왜 나에게 이런 가혹한 일을 하냐고 물어봤다. 그들은, 너희 민족은 책(아마도 코란?)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이며 이런 일을 당해 마땅하다고 했다. 본인의 강간사실과 가족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침착하게 이야기하던 여자는 결국 인터뷰 말미에 울음을 터뜨렸다. 2016년도가 어떤 시간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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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밖으로 나가서 호숫가를 거닐었다. 친구는 호수가 보이는 집에 살았다고 했는데 아마도 저기일까. 호수가 보이는 집들을 하나씩 보면서 친구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내가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날 때 친구는 안시에서 사온 트렁크를 빌려주었다. 나는 1년간 그 짐가방을 갖고 다녔다. 내년에 그 친구의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책가방은 꼭 내가 사주겠다고 했는데. 추억이 가방에서 가방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서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마지막 도시인 파리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