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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다. 많이 먹지도 않은 음식들이 아직도 몸속에서 존재감을 뽐낸다. 소화가 잘 되지 않은지는 오래다. 그래서 아침도 점심도 최대한 적게 먹었지만 명절 음식이 기름져서인지, 내가 활동량이 적어서인지 배가 꺼지지 않는다. 최근엔 주변에도 유독 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단순히 체하고 낫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소화가 잘 되지 않아 먹는 것을 조절해야 하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한 번 체했을 뿐인데, 이전처럼 먹지 못하게 되는 기분을 나는 잘 안다. 단단히 체해서 운 나쁘게 잘못 걸린 기분이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가는 기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식탐 많은 대식가에서 식탐이 없는 소식가로 단숨에 변신하는 기분도 든다. 어제와 완전히 다른 나가 되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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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먹던 소화제를 몇 알 삼키고 침대로 돌아와 책을 폈다.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의 소설집이다. '칠면조'라는 단어가 들어있어서 크리스마스에 읽어야지, 하며 샀던 책이었는데 한 달이나 지나서 펴보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칠면조는 크리스마스에 먹는 음식도 아닌데. 착각을 심하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 육체노동자인 오십 대의 경구는 냉동 칠면조로 술집 사장 머리를 내려치고서 남의 트럭을 몰고 달린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난다. 시작부터 개새끼 같은 욕이 난무하는 이야기다. 이게 내가 크리스마스에 읽으려고 골라놨던 소설이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뭐야 왜 표지는 쓸데없이 블링블링해서 나를 낚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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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이라 금세 읽고 책을 덮었다. 침대에서 가만히 책을 내려다보니 방이 고요하다. 침묵하는 방에서 나는 경구와 비슷한 이를 한 명 떠올린다. 그 사람은 지금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가 바라본 세상의 모습을 이야기로 써보면 나는 무슨 글을 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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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는 방은 나를 고요하게 소화시킨다. 침대 위에는 읽다만 천명관의 소설책과 싱가포르 여행가이드, 관상책이 놓여있다. 뭐 하나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내 성향을 대변하는 듯한 장면이다. 나는 싱가포르를 여행할 것이고, 또 친구의 관상보기 모임에 초대될 수도 있고,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처럼 욕이 난무하는 단편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모두 재밌어 보인다. 책들은 서로 다른 소화효소처럼 나를 분해한다. 이렇게 내방에서 조용히 해체되는 것이 즐겁다. 뱃속의 음식들도 잠깐 신경 쓰이지 않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