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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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문과생은 글을 쓸 일이 가장 많다. 나는 줄 글로 뭔가를 적는 것이 익숙했다. 선생님은 칠판에 글씨를 적었고 나는 그걸 받아 적었다. 친구들과 주고받는 편지나 쪽지도 글로 되어 있었다. 그런 세상이 끝난 건 대학에 들어갔을 때였다. 대학에 들어가자 별안간 발표를 하라는 주문이 많아졌다. 그리고 발표를 하기 위해서는 ppt를 만들어야 했다. 학교에는 ppt 장인이 많았다. 나는 그때 ppt 만들기에 대한 공포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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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t 장인들은 어디선가 그럴듯한 이미지를 가져다가 슬라이드를 채웠다. 알 수 없는 점과 선들이 연결된 세련된 이미지들은 어쩐지 프로페셔널한 느낌을 주었다. 지금 보면 아마도 촌스러울 것 같지만, 당신엔 그랬다. 나는 그런 멋진 이미지를 모든 슬라이드에 통일감 있게 장착하는 법을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검색도 잘 못했고, 과도하게 간결했던 것 같다. 짝사랑도 삼 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고백하는 직진 파인 나는 슬라이드에도 중요한 말만 적었다. 이미지를 넣어야 하는 이유도 찾지 못한 채, 그저 그럴듯한 것만을 찾아 헤맸으니 제대로 발표자료가 만들어질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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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공포 때문에 취업해서 그룹 연수를 갈 때도 메모리에 슬라이드 템플릿을 잔뜩 저장해갔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그룹 연수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발표자료를 찍어내게 했다. 새벽까지 발표자료를 만들다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화룡점정은 영상을 만들어 내라고 한 과제였다. 조 별로 촬영 장비를 주며 영상을 만들어 제출하라고 했는데, 우리 조에는 영상 편집이 가능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당시 유튜브도 없었던 시절인데도 조에 영상편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한둘은 있었던 모양인데, 우리 조엔 불운하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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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불운하지는 않았던 게, 연수가 끝나기 전에 신종플루가 연수원을 덮쳤다. 그래서 그룹 연수는 예정보다 이틀 먼저 끝났고, 우리의 영상 과제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얼마나 다행이던지. 그 일이 계기였을까, 사내 방송을 열심히 했던 나는 일 년쯤 뒤에 영상제작센터에서 베가스로 영상 편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정말 오만가지 배우고 다니는 성향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심지어 애니메이션도 만들고 싶어서 애프터 이펙트 수업도 들었다. 포토샵도 잘할 줄 모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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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많은 표현 도구들을 돌고 돌아 지금의 나는 글을 가장 자주 쓴다. 제일 잘하고 싶은 것도 역시 글이다. 왜냐면 글은 곧 생각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장면을 떠올리기도 하겠지만, 내 생각은 대체로 언어로 되어 있다.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만큼 사고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더 간결한 생각을 갖고 싶고, 매일매일 새로운 생각을 갖고 싶다. 그런 것들이 아마 글로 가능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더 잘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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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래밍을 배우기 전에는, 배워서 개발자로 전직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몇 년을 배워보니,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글도 그렇다. 한국말인데 글 누가 못 쓰나. 그런데 글을 잘 쓰려고 해 보니 세상에 글 잘 쓰는 사람이 참 많고, 나는 거기까지 너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전에 <영향력>이라는 아마추어 작가의 글을 내주는 계간지를 구독한 적이 있었다. 거기 있는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취미로 쓰는 사람들도 이 정도를 쓴단 말인가. 정말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았다. 더 잘 쓰기 위해서 얼만큼의 노력이 더 필요할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일단 할 수 있는 것의 최선을 다해 본다. 그래서 오늘도 단순한 질문에 여섯 문단의 답변을 달아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