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말린다고 할 정도로 깊게 빠져 본 경험이 있나요?

day-74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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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한 때 회사에 깊이 빠졌었다. 눈 뜨면 바로 회사로 달려가서 매일 자정에 퇴근하던 시절이 있었다. 집에 와서 자려고 불을 끄면서도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주말에 열리는 행사에도 누구보다 먼저 자원했다. 밤을 새워 서비스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밤새도록 간식을 나르고 회의실 구석에서 쪽잠을 잤다. 다음날 퉁퉁 부은 얼굴로 결과물을 구경하면서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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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문화가 훼손되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닌 걸 보면 가차 없이 아니라고 말했고 자주 나서서 팔을 걷어붙였다. 그 시절 받은 피드백에는 문제 해결은 잘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은 살살 좀 해달라는 말들이 적혀있다. 나의 거친 커뮤니케이션을 받은 사람들도 힘들었겠지만 어떤 일이든 손을 대면 잘못 돌아가는 일들이 눈 앞에 펼쳐지는 내쪽도 녹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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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 지켜본 리더는 한 달에 한 번 쌓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내 인생에 비싸고 맛있는 것을 가장 많이 먹어본 시절인 것 같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회사 이야기를 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 스트레스받는 곳도 회사였지만 푸는 곳도 회사였다. 이 시절에 나를 본 친구들은 내가 회사를 영원히 다닐 것 같았다고 한다. 지금은 그때 같은 마음 가짐은 아니지만 그 시절엔 정말로 회사에 푹 빠졌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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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면서 깊게 빠져 본 것을 돌이켜보는데 회사 외에는 빠졌다고 말할 만한 다른 것이 없다는 점이 재밌다. 한꺼번에 뭘 많이 해서 감탄을 자아낸 적은 있어도 뭔가에 깊이 빠진 모습은 스스로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나의 관심사는 얕고 넓다. 아마 회사는 그러기에 좋았던 공간일지도 모른다. 공개 플랫폼에서 일하는 회사라 수많은 부서 게시판에 들어가서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를 하루 종일 보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얕은 관심사를 계속 펼쳐나가도 끝없이 볼 것이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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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하고 나서 아주 예전 히스토리까지 다 뒤져본 게시판들이 몇 개 있었다. 그중 하나가 입사자가 자기소개를 하는 게시판이었다. 거기서 여러해 전 자기소개까지 모든 사람의 자기소개를 읽었다. 그러고 나서 간혹 회사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거기서 읽은 자기소개가 떠오르곤 했다. 회사를 덕질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덕질은 이제 끝나고 나는 회사의 옛이야기를 잘 아는, 즉 옛날 사람이 되었지만, 한 때 그렇게 회사를 재밌게 다녔던 경험은 중요한 재산이 되었다. 회사가 재밌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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