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75
1
대학 졸업 무렵 이별을 경험했다.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지하철 플랫폼에서 아는 언니와 통화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언니는 지금도 그날의 에피소드를 나의 흑역사로 들먹인다. 드라마에서 보면 이별한 사람들은 그렇게 술을 마시던데, 나는 술마실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문구점에 가서 스케치북만한 캔버스를 하나 샀다. 거기다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마침 클림트의 키스가 그려진 커다란 파일이 있어서, 그 파일을 옆에 두고 아무 생각없이 따라 그렸다.
2
배경부터 칠하기 시작했다. 유난히 노랑색이 많이 들어가는 그림이었다. 황토빛 노랑, 병아리 노랑, 레몬 노랑 오만가지 노랑을 만들어대며 칠했다. 노랑을 다 칠하고 나서는 아랫부분 잔디를 칠하기 시작했다. 거기는 온통 초록이었다. 여러가지 색의 초록을 만들어서 칠했다. 그렇게 일주일 넘게 색깔을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왔다. 그 그림은 아직도 사람 얼굴이 채색이 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아마 거기까지 칠하기 전에 기분이 돌아온 모양이지.
3
첫 번째 회사를 퇴사했을 때도 비슷했다. 퇴사할 때 친구가 만년필 세트를 선물했다. 파랑, 초록, 빨강, 오렌지 에 금색, 은색 잉크까지 있었다. 여러가지 모양의 촉이 들어있어서 촉을 바꿔가며 써볼 수 있는 근사한 물건이였다. 나무 상자에 들어있었는데 그 상자를 열 때마다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4
그 시절에 소설 <금각사>를 한 번 더 읽었다. 금각사는 처음 읽을 때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두번째 읽을 때는 처음 볼 때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이해가 되어서 재밌었다. 소설에는 '투탈자재'라는 말이 나온다. 그 말이 나오는 대목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투탈자재(透脫自在)'라는 한문을 초록색 잉크로 적었다. 열 번도 넘게 적었다. 그리고는 제일 마음에 들게 써진 글자를 사진으로 찍어 남겨두었다.
5
그런 걸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내 안의 프라임 세포가 나와서 다친 세포들을 치료해주고 사라지나 보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고나면 어려움은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읽을 소설은 아직도 차고 넘치고, 그려보고 싶은 그림도 아직 많다. 앞으로 찾아올 울적함에 잘 대비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울적함이 길어지면 못다 그린 그림이 완성된 상태로 남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