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소년 이야기

영화 <에놀라 홈즈>

by Lucie

어릴 때부터 셜록 홈즈 시리즈를 좋아했다. 집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셜록 홈즈 시리즈가 있었는데, 얼마나 오래된 책인지 속지가 노오란 갱지였다. 책에는 셜록의 조수 이름이 '와트슨'이라고 써있었는데 크고 나서 그 이름의 정체가 'Watson'이었다는 것을 알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셜록 홈즈에 나오는 주요 등장인물은 대체로 남자다. 왓슨도 레스트레이트 경감도 모두 남자. 베이커가의 하숙집을 지키며 담력 만랩이 되신 허드슨 부인만이 주요 인물 중 유일한 여자였다. 그런 것이 특별히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무도 그게 문제라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에놀라 홈즈>는 그런 불편함을 정면으로 등장시킨다. 셜록 시리즈에서는 셜록의 어머니나 여동생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는데, 홈즈 가문의 여성 캐릭터를 둘이나 만들어 주요 인물로 삼았다. 그리고 홈즈 가문의 남성 집단인 마이크로프트와 셜록을 묶어 대립시킨다. 마이크로프트 역에는 헝거게임의 초미남 '피닉'역을 맡은 배우가 등장하는데, 얼마나 하는 짓이 얄미운지 잘생김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같은 배우라는 것도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알았다.


이 영화에는 또 다른 주요 인물이 있는데, 바로 튜크스베리 자작이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식물 덕후다. 꽃이며 곡식이며 버섯까지 들판에 보이는 식물이름을 좔좔 읊는다. 비상한 두뇌나 싸움실력 같은 건 없는 보통의 소년이다. 대신 그에게는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이 있었고, 여성의 참정권이 없는 시절에 진보주의자로 여겨졌다. 그 마음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그를 구하기 위해서 활약을 펼치는 사람이 바로 에놀라다.


영화 중간에 에놀라와 튜크스베리 자작이 레스트레이트 경감에게 쫓기는 장면이 나온다. 급하게 닫은 문 앞에 서랍장을 밀어놓고 에놀라는 자작에게 도망가라고 소리친다. 혼자 두고 갈 수 없다는 자작에게 에놀라는 소리를 지른다. "난 기껏해야 원하지 않는 삶을 살 뿐이지만 넌 죽는다고, 제발 가!" 그 말에 자작은 그렁그렁한 눈길을 잠시 주다 냅다 줄행랑을 친다. 이 장면에서 잠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왜 웃었을까?


예전에 사관학교에 다니는 오빠의 초대로 축제에 간 적이 있었다. 예쁘게 차려입은 생도들의 여자 친구들이 초대받아 그 자리에 와있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생도가 남자만 있던가? 그렇지 않다. 거기에는 적지만 생도의 남자 친구들도 와 있었다. 제복을 입은 여자 친구와 함께 있는 남자 친구들이 왜인지 약간 주눅이 들어 보였다.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걷는 생도 뒤를 따라가던 남자 친구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다. 생도 남자 친구들은 정말 주눅이 들어있었을까? 아니면 나만의 생각일까?


여자가 대신 잡혀가고, 남자가 도망치는 장면이 어째서 우스웠던 것일까. 그 반응에는 나에게도 성에 대한 선입견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이 웃게 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예상에서 크게 벗어날 때 웃게 된다고 한다. 내 머릿속에는 위기에 처한 여자를 남자가 구해야 한다는 예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 클리셰를 만들어낸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들 탓을 조금 해보면서, 뻔한 것을 기대한 나를 잠깐 반성해 본다. 어쩌면 많은 상황에서 소년들은 남자라서,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자기 답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넘치는 곳에서 사복을 입은 남자가 받아야 했던 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이 받지 않아도 될 압박이 거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튜크스베리 자작은 자신을 군대로 보내려고 했던 집에서 도망쳐 런던에서 꽃을 팔았다. 영화는 그렇게 억지로 남자와 여자의 설정을 바꾸고 있다.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이 생각난 것은 이 생억지 설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주짓수를 배우는 여주인공과 책갈피에 꽃을 눌러 말리는 남주인공의 설정은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묘한 불편함을 주었을 것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남자가 보면 공포로 읽히고, 여자가 보면 코미디로 읽힌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주인공인 소년이 엄마 친구(여자)에게 집에서 성추행을 당하는 장면에서 너무 괴로워 책을 덮고 말았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 때문에 억압받는 이야기는 괴롭다. 영화 속에서 에놀라는 엄마와 오빠의 지지로 자신의 삶을 찾아나가지만, 튜크스베리 자작도 그랬을까. 아직 끝나지 않은 그의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서 편치 않았다.


<에놀라 홈즈> 나무위키 페이지를 보면 등장인물에 튜크스베리 자작 역은 에놀라와 오빠들, 그리고 엄마 다음으로 소개되고 있다. 주인공 취급도 가장 마지막에 받은 식물 덕후 소년을 지지하면서, 에놀라 홈즈의 후기를 마쳐 본다.

스크린샷 2020-12-19 오후 4.33.06.png 다섯 번째로 소개되고 있는 튜크스베리 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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