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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ie Aug 07. 2022

COO라는 이름의 정체

스타트업 일기 5편

회사를 만들 때 내 직함에 대한 별 생각이 없었다. 단지 세 명짜리 회사에서 C자를 붙이려니 부끄럽네, 그런 생각이었다. 셋인 회사에서 대표나 엔지니어가 하지 않는 나머지 일이 다 내가 할 일이었고, 그걸 하는데 호칭을 뭘 붙이든가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최근에 스타트업 COO에 대한 기사를 하나 보다가 생각보다 스타트업 COO가 하는 일이 제각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스타트업 '홍반장' 투자혹한기 생존법 "위기는 기회, 내실 다져라")


COO는 Chief operating officer의 약자로, 최고 운영 책임자다. 일반적 정의로는 기업이 커지고 복잡도가 높아졌을 때 CEO의 의사결정을 대신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스타트업은 기업 구조가 복잡해서라기 보다 다양한 일을 하는 책임자를 부를만한 이름이 딱히 없어서 COO라고 붙이는 것 같다. 기사를 보면 COO가 사업을 총괄하는 경우도 있고, 여러 개 기능 조직의 리더를 맡거나, 인사나 재무 쪽 업무를 주로 하는 경우도 있다. 나만 하더라도 주로 인사, 재무 업무를 하지만 투자 업무는 서툴어서 CEO가 하는 일을 돕는 수준이고, PM이 없다보니 다들 바빠 보일 때는 스펙 문서를 정리해서 엔지니어에게 리뷰해주고 있는 일도 생긴다. 그냥 필요한 일을 그때그때 해치워 나가는 실무 부대원 느낌이다. 


그래서 COO는 특별한 전문성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DBR에서도 '보통 COO는 CFO처럼 전문영역이 없고 CEO와 유사한 업무를 수행한다'라는 설명을 찾을 수 있다. 이 대목에서 피식 웃었던 게 회사에서 일할 때 유난히 다른 항목에 비해 전문성이 약했던 나의 과거가 떠올라서였다. 카카오에서는 매년 평가 제도를 조금씩 바꾸었는데 여러 해 전에 다섯 가지 항목에 점수를 매겨서 상대적으로 좋은 점수를 받은 항목을 붉은색으로, 상대적으로 낮은 점수가 나온 항목을 파란색으로 표시해 준 적이 있었다. 나는 '오너십'이 붉은색, '업무 전문성'이 파란색으로 표시되었다. 이때는 검색만 하면 나오는 정보가 내 입에서 술술 나오지 않는다고 전문성이 낮은 걸까, 하는 약간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이때쯤 내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서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구가 지극히 낮았던 때였다. 일개 팀원인 주제에 오너십이 쓸데없이 강한 점도 웃음 포인트.


파란 업무전문성 영역 vs 붉은 오너십 영역


요즘에는 되려 앞으로 COO로서의 정체성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내가 알아야 하는 것이 많다는 것이 느껴진다. 일을 할 때 모르는 지식들이 나오면 잘 기억해두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직무를 바꾸니 더 겸손해지고 열심히 하려는 마음도 생긴다. 우리 회사 슬랙 프로필에는 대개 자기가 하는 직무가 적혀있는데, 나는 거기에 뭐라고 적을까 생각하다가 누가 하는지 모르겠는 일은 다 나에게 달라고 적어두었다. 


Slack에 내 소개!

나는 인사나 재무 등 스탭 직군이 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개중에 어떤 일들은 쉬운 일이라서 잡일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잡일도 잘하는 것은 쉽지 않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더라도 그것을 잘 해내는 것은 어렵고, 언젠가 내가 이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지금은 스타트업 COO는 어떤 사람인지, 아니면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조차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언젠가 스스로를 전문 경영인(?)이라고 소개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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