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4
1
면접관이 물었다. 요즘 즐거운 일이나 재밌는 일은 뭐가 있어요? 그즈음의 나는 다시 이력서를 쓰고 있었다. 한 번 취업하면 이력서 쓰는 일이 다시 없을 줄 알았는데, 되려 이력서 쓰기는 더 까다로워졌다. 의지없이 배치되었던 부서들에서 내가 한 일을 적어야 했다. 회사를 왜 그만두었는지 없는 이유도 만들어야 했다. 그러다 머릿속이 꼬여 아무 글자도 쓸 수 없을 때는 애니팡을 했다. 면접관이 즐거운 일을 묻자 애니팡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생각났다. 면접관에게 웃으면서 애니팡을 무템으로 150만점 정도 받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면접관이 지금 나를 뽑을지 말지 고민하면서 물었는데, 재밌는 일에 애니팡이라니. 대답 참 잘도 했네. 돌이켜 생각해도 이불킥 감이다.
2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면접관도 너무했다. 희망퇴직한 구직자에게 재밌는 일은 거의 없다. 퇴사를 하고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서 지역의 고용센터를 찾았다. 거기에는 서로 다른 이유로 회사를 그만 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컴퓨터를 잘 못쓰시는 장년층부터 내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까지 연령도 특징도 다양했다. 모두가 고용센터의 강의를 듣는내내 한 번도 웃지 않았다.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용센터에 나와서 강의를 들어야 한다. 같은 날 그만둔 동기들과 이야기하면서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서울 지역의 강의장들은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찬다는 것이었다. 그 강의는 매일 있고 지역마다 있다. 그리고 실업급여 개시를 위해서는 그 강의를 한 번만 들으면 된다. 실업급여를 개시하는 사람이 매일매일 그렇게나 많다니. 충격이었다.
3
한창 런닝맨이 인기몰이를 하던 때였다. 그런데 그때는 좋아하던 런닝맨도 달갑지 않았다. 이력서를 쓰고 한 두군데의 회사에 면접을 보고나면 주말이 왔다. 이렇게 또 일주일이 가버렸다니. 실업급여가 나오는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 실업급여로 먹고 사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실업급여가 끝나기 전까지 취업을 해야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4
재취업 회사를 고르는 기준은 안정성이었다. 나는 이제 적자가 나는 회사에 가지 않겠다, 라는 강렬한 기호가 생겼다. 그래서 재취업을 할 회사는 재무제표를 보면서 골랐다. 순이익이 얼마나 되는지, 추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살폈다. 그 과정에서 의외의 알짜 회사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대졸 백수에게 선택지란 거의 없는 듯 보였다. 그래도 최대한 IT 업계는 피하고 싶었다. 한때 대한민국을 주름잡았던 서비스일지라도 유행에 뒤떨어지면 끝이었다. 내가 퇴사를 해야했던 이유는 유행에 부합하지 못해서 인것 같았다. 나는 다시 그런 불안정한 업계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5
이런 저런 면접을 봤다. 어제 매출 얼마야? 오늘 매출 얼마 나올거 같아? 하루를 이 말로 시작하고 싶지 않아서 본부를 옮겼는데, 면접은 주로 광고나 사업에 관련된 역할로 봤다. 어떤 회사는 책상도 없는 사무실에서 나를 맞았다. 어떤 회사는 2차면접을 일본 사람에게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즈음 야후의 계열사였던 오버추어도 문을 닫았다. 먼저 이력서를 달라고 했던 분이 오버추어쪽 사람을 뽑게 되어서 어렵게 되었다며 사과를 하시기도 했다.
6
평일에 백화점을 자유롭게 갈 수 있게 되었다. 유니클로에서 히트텍 세일을 시작한다고 했다. 세일 날짜를 기억해 두었다가 첫 날 백화점에 갔다. 사람이 정말 많았다. 히트텍 코너는 더 전쟁터였다. 이 사람들은 다 어디서 온 걸까. 회사 안 다니는 사람들이 나말고도 많았구나. 원하는 색깔은 원하는 사이즈가 없었다. 맞는 사이즈는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력서 쓰면서 집에만 있을건데 이걸 사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필요하지도 않은 걸 사러 왔을까 돈도 못 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