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

day-5

by Lucie

1

새로 입사한 회사는 방송국의 자회사였다. 남양주시에서 일산시까지 출근을 해야 했지만, 백수에게 그런 건 큰 장애물이 아니었다. 역에서 회사 정문까지는 십오 분 남짓 걸어야 했다. 처음 출근했던 날이 생각난다. 눈이 퍽 쌓인 길을 검정 플랫슈즈를 신고 자박자박 걸었다. 출근 첫날이라고 잘 입지 않는 치마를 차려입고 가는 길이었다. 두꺼운 스타킹을 신었지만 발등이 시렸다. 얼얼한 발등으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1박 2일 최종면접을 치른 터라 낯익은 얼굴들이 많았다. 인사를 하고 어색한 사무실에 짐을 풀었다.


2

입사한 회사는 출근하는 날까지 처우를 알려주지 않았다. 출근하면 연봉을 알려주려나 했는데, 기다려도 아무 말이 없었다. 이튿날은 진급 행사 같은 것이 있는 날이었다. 신기하게도 방송국은 직급이 사원과 차장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원으로 입사해서 이십 년 가까이를 일하면 차장이 되는 것이다. 차장 진급은 그래서 꽤 대단한 이벤트다. 들어온 지 며칠 안된 터라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진급이었지만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 끝 무렵에는 신규 입사자에게 사령장을 수여하는 코너가 있었다. 나는 이날 '사령장'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다. 그러니까 나를 이 회사의 사원으로 임명하는 문서를 수여하는 것이다. 사령장을 받으면서도 내 머릿속엔 연봉에 대한 궁금증뿐이었다. 왜 월급 얼마 줄지 말도 안 해주고 나한테 사령장부터 주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눈치만 보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3

야, 나는 연봉계약서 놓고 이렇게 오랫동안 싸인 안 하는 사람 처음 본다.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해주던 선배가 조금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제야 나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길로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 아니라면 나는 여기에 사인을 해야 하는 거구나. 맥없이 풀린 손을 다시 들어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이전에 내가 연봉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금액보다 적은 금액이 연봉계약서에 쓰여 있었다. 이런 연봉을 제시할 거였다면 입사 전에 알려줬어야 하지 않나. 사장님 얼굴 보고 사령장 받게 하고, 제작센터를 다 돌아다니면서 인사를 시키고, 이제 와서 이런 간당간당한 연봉을 보여주며 그 자리에서 사인을 하라고 하다니. 불합리하다는 생각에 억울해졌다.


4

회사를 좀 다니다 보니 이 곳은 두 가지 보상시스템을 동시에 운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호봉제와 연봉제. 본사의 공채나 이 회사의 주요 직무 공채는 호봉제를 적용받았다. 경력으로 입사한 사람들은 다 연봉제였다. 출신의 격차가 현저한 곳이었다. 새로 부임하는 사장이 졸업한 학교가 나와 같다면서,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곳이었다. 팀에는 두 개 파트에 자리가 있었다. 내가 일할 곳이 정해지지 않아서 나는 매일 의미 없는 리서치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일을 시키면 리더는 누가 나에게 일을 시켰냐고, 할 일이 정해지기 전까지 일을 시키지 말라고 했다. 매일 할 말이 많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5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면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손에 꼽히는 20대 직원이라서 귀여움도 받았고, 처음에는 적응도 잘 한 줄 알았다. 봄이 왔을 때 이전 직장 사람들이 새 회사에 적응을 잘 했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아니요. 적응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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