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퇴사

day-6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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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에 들어 있는 돈이 얼마나 있나를 헤아려 봤다. 이 정도면 한 두 해는 버틸만하다고 생각했다. 유학을 가려면 어떤 성적이 필요한가를 검색해 봤다. 어떤 시험을 봐야 한다고 나왔다. 문제를 봤는데 정말 생소한 영어였다. 이 정도 되는 시험을 영어로 쳐야 한다니. 이걸 공부하느니 차라리 한국말로 된 공부를 하는 게 더 빠르겠다 싶었다. 한국말로 된 시험은 뭐가 있더라. 아 로스쿨이 있었지.


2

너 회사 다니잖아. 몇 년이나 다녔지? 4년? 그럼 그냥 회사 다녀. 로스쿨 졸업해서 회사 가도 대리 정도야. 너 공부 시작해서 로스쿨 3년이나 다니고 운 좋게 대기업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지금 그 자리다? 전화기 너머 친구의 대답은 냉정했다. 서울에서 법대를 졸업하고 지방 로스쿨에 입학해 졸업을 앞두고 있는 녀석이었다. 회사를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로스쿨을 선택하려는 나에게 팩트 폭격을 퍼부었다. 너 뭐 말하는 직업 갖고 싶다고? 변호사는 말하는 직업이 아니라 쓰는 직업이야. 너 드라마에 나오는 변호사 보고 변호사 되겠다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오래간만에 하는 통화였는데, 오래 안 봐도 성격이 어디 가지 않았다. 그래도 여러 해 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서먹함 없이 팩트 폭격해주는 친구가 고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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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에 대한 생각을 깨끗이 접게 된 것은 문제를 풀어보고 나서였다. 로스쿨에 입학하기 위한 시험과목으로 언어이해와 추리논증이 있다. 언어이해는 수능시험의 언어영역과 유사한 문제들이다. 다만 지문의 내용이 어렵고 길어 문제 난이도가 높다. 허들은 추리논증이었는데, 꼭 정답이라고 생각해서 고른 답들이 죄다 틀렸다. 좍좍 틀렸다고 그어진 시험지를 보니, 내 머릿속 논리 회로는 아예 납땜이 잘못된 것 같았다. 그래, 친구도 이건 길이 아니랬어. 그냥 관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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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도 로스쿨도 다 포기하고 나니, 이직밖에 남지 않았다. 이직 관련 어플을 핸드폰에 깔았다. 친구가 자기 회사 인사팀에 곧 사람을 뽑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공고가 나기도 전부터 나는 지원서를 썼다. 온 진심을 다해서 썼다. 정말로 공고가 났고, 나는 공고가 나자마자 완성된 이력서를 보냈다. 입사 후 우리 팀 업무 기록을 봤다. 내 지원서는 1번이었다. 그리고 내 자기소개는 클래스가 다르다는 평이 있었다. 이유는 자기소개에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라고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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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차에 비해서 사회생활의 쓴 맛을 많이 봤네요. 최종 면접관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 다들 이렇게 사는 거지 싶었는데, 그래도 내가 좀 어렵게 살긴 했나. 결과적으로 나는 어려운 사회 초년기 덕분에 그 면접에 합격했다. 연차가 짧은데 벌써 세 번째 회사로 입사하려는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 면접관이 있었다. 그는 나를 합격시킬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의 쓴 맛을 봤으니 뭔가 다르지 않겠냐는 옆 면접관의 이야기에 반드시 탈락시킬 필요는 없겠다고 마음을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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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만 더 다니면 퇴직금을 받고 퇴사할 수 있었지만, 나는 신속하게 퇴사 절차를 밟았다. 사장님은 점심을 사주시며 서른 전에는 어떤 도전이든 다 좋다고 했다. 힘들게 다닌 회사였지만 퇴사할 때는 응원을 많이 받았다. 나는 인사팀에서 일해본 경력 없이 운 좋게 인사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관련 업무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 신입사원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가서 누구한테든 열심히 배워야지. 새로운 입사를 앞둔 나는 무척 신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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