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이브 일기
요즘은 내 나이가 정확히 몇 살인지 헷갈린다. 호랑이 띠지만 양력 생일은 87년이라서 살다 보니 86년생, 87년생 모두와 친구를 하고 있다. 게다가 올해는 나이를 생일 기준으로 센다는 새로운 셈법이 도입되면서 당최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정확히 헤아리기 어려워졌다. 얼마 전 독감에 걸려서 약국에서 타온 봉투에 내 나이가 만 37세라고 적혀있었다. 내년이면 서른여덟, 이제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삼십 대 중반이 되면 인생의 두 번째 진로 결정의 시기가 온다. 첫 번째 진로 결정이 대학졸업과 함께 시작되었다면, 두 번째는 어느덧 십 년 넘게 직장생활을 한 이들이 그 뒤 십 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는 시기다. 십 년을 하면 정체기가 한 번은 오는 것 같다.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처럼 월급도 사회적 성공도 처음처럼 그렇게 탐스럽게 느껴지지 않게 되는 시기다. 또 어느 정도 사회생활의 섭리를 알게 되면서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으면 50이 오기 전에 계약직 임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래서인지 그 무렵 주변 친구들도 진로를 변경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이직뿐만 아니라 업무 분야를 완전히 바꾸기도 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진학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스타트업 창업을 하던 해에도 친구 하나가 스타트업 대표로 이직하고, 한 명은 혼자서 창업을 해서 대표가 되었다.
인사업무를 하던 우리팀의 경우는 더 드라마틱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던 무렵에 우리 팀이 없어졌다. 없어지면서 임시적으로 옆 팀과 합쳐졌는데, 그때 우리팀에 나보다 어린 친구들은 각각 데이터 분석과 서버 개발로 직무를 바꿨다. 우리팀에서 그만큼 역량 있는 팀원들을 데리고 있었던 거기도 하지만, 평소 공부를 해서 다른 회사 개발 공채로 합격한 케이스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어려운 공부를 해낸 것도 대단하고, 여러 해의 인사경력을 버리고 직무를 갈아탈 정도로 인사 업무가 매력이 없었다는 점도 놀라운 대목이다. 얼마 전에는 삼십 대 중반에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한 친구를 만났다. 이제 박사 과정 중인 친구는 교수가 되어서 사학연금을 받으려면 최소 연금을 15년은 내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늦어도 45세에는 교수가 되어야 연금 수령에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와 우리가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나, 새삼 놀랍기도 하면서 지금까지의 시간보다 앞으로의 시간이 체감적으로 더 빨리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40대가 된 입사동기들도 이제 자기 커리어가 몇 단계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특히 IT 업계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 사이에서 나이가 많아 못 어울리는 사람들을 모아서 모임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반대로 그런 트렌드에 전혀 탑승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는데 우리 회사 공동창업자인 내 남편이다. 내 남편은 연애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이가 제약이 된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일에 대해서는 할 일은 얼마든지 있고 없으면 혼자서라도 만들어서 하면 된다는 간편한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걱정이 산더미 같은 나에 비해 별다른 걱정이 없는 편인 남편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나이 제약 없이 살 수 있을지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
나는 관종 꼰대(?) 외향인이다. 대체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했을 때 행복을 얻는다. 누군가 도와달라고 요청할 때 반갑고, 다른 사람에게 진짜 도움을 줄 수 있는 역량이 탑재될 때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을 느낀다. 그래서 오래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창업 후에 마음 고생하면서도 그래도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회사에 재미를 잃으면서는 일도 그렇게 열심히 안 하고 배우는 것도 적었다. 반대로 창업을 해보니 새로 배우는 것도 많고, 스타트업의 현실이 무엇인지도 몸으로 부딪히며 깨닫는 중이다. 송길영 부사장님도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에서 자신만의 서사가 있는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나도 나만의 경험을 통해서 더 오래 일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내년에는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콘텐츠를 더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일하는 비법은 그래서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내 나이를 잊어버리는 것. 그리고 나만의 서사를 만드는 것. 나이를 잊어버려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더 잘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나에게도 좋은 회사 만들기, 훌륭한 코치되기, 소설 쓰기 등등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데 나이와 기회비용 같은 걸 고려하기 시작하면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일이 많다. 그런 것들을 눈감고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려면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신뢰와 지지가 필요하다. 창업하고 나서 스스로를 믿고 응원해 줄 수 있는 마음이 부족해서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다. 올해를 보내면서 나는 나를 진정으로 응원하는 마음을 얻은 것 같다. 물론 앞으로도 한참 더 응원하는 마음이 필요하겠지만, 나를 위한 마음을 더 많이 쓸 수 있게 되는 것은 기쁜 일이기 때문에 기꺼이 해 나가려고 한다.
오늘 저녁에도 크리스마스이브에 코칭을 신청한 고객이 한 분 있다. 열심히 사는 고객 덕분에 덩달아 부지런한 코치가 되는 행복한 크리스마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