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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ie Feb 03. 2024

누구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가

콘크리트유토피아

어제 축구 경기를 보려고 기다리다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봤다. 최근 아이유의 love wins all 뮤직비디오를 만든 엄태화 감독의 영화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우리나라의 전국민적 소망이 '내 집 마련'인 것을 조망하면서 시작한다. 즐거운 나의 집이 배경음악으로 깔리고 아파트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한 몇십 년의 장면들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갑자기 큰 지진으로 세상이 무너진 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스포가 있음***)


바둑알의 쓴 맛

인상적인 대목은 이병헌의 연기다. 영화에서는 김영탁이라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첫 장면부터 뭔가 쎄함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가족을 사랑하고, 내 집 마련을 하고 싶었던 평범한 사람이다.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 있고 그것을 침해당할 때 크게 분노한다. 그는 황궁 아파트를 사려다가 사기를 당했는데 사기 친 103동 902호 김영탁에게 따지러 갔다가 급발진해서 그를 죽이고 만다. 김영탁을 죽일 때 옆에 있던 바둑알을 그의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내 돈을 내놓으라고 마구 소리 지른다. 때마침 세상이 전복되면서 황궁아파트 103동 빼고 주변 모든 아파트가 무너져 내린다. 그렇게 그는 김영탁인 척하면서 황궁아파트에서 지내게 된다.


한 겨울 추위에 집을 잃은 동네 사람들이 황궁아파트로 몰려든다. 하지만 황궁아파트 사람들은 주민대표를 뽑고, 주민들의 투표를 통해서 몰려든 외부인을 내쫓기로 한다. 쫓아낼 때 투표를 바둑알로 한다. 내보낸다는 흰돌, 받아준다는 검은 돌. 쏟아낸 바둑알은 온통 흰돌이었다. 그렇게 황궁아파트에 몸 붙였던 외부인들이 쫓겨나고 아파트 단지에는 방어선이 구축된다.


나중에 김영탁이 가짜 주민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 김치 냉장고에 들어있던 진짜 김영탁의 시체가 나온다. 시체를 덮었던 천을 열자 죽은 김영탁의 입에서 바둑알이 툭 튀어나온다. 흰 바둑알이었던 것 같다. 바둑알이 바닥에 또르르 구르는 소리. 바둑은 상대방의 수를 읽고 내 수를 두는 대결이다. 수를 대결하는 게임이 룰이 없는 곳에서 모두 쓸모없어지는 것을 본 바둑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흰 바둑알은 아무 생각이 없다. 그걸 보는 인간만이 쓴 맛을 느낄 뿐이다.


첫 번째이자 제일 쓸모없는 원칙

황궁 아파트 사람들은 주민대표를 정하고 투표를 통해 외부인을 내쫓은 뒤 원칙을 만든다. 원칙 제1번은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문장이다. 이걸 보자마자 조지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이 생각났다. 동물들도 자신들을 부려서 돈을 버는 인간들을 내쫓은 뒤에 농장의 7 계명을 만든다. 1 계명이 '무엇이든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라는 문장이다. 내 편과 적을 명확하게 긋는 이 첫 번째 원칙이 너무 닮아서일까. 무리가 생기면 대표를 뽑고 조직을 구성하는 점이 닮아서일까, 바로 동물농장이 떠올랐다.


이 첫 번째 원칙은 두 작품 모두에서 여러 번 외치는 구호로 활용된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주민대표는 김영탁인 척하고 있는 외부인이다. '무엇이든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라고 외치는 리더인 돼지는 금방 두 발로 걷고 나중에 인간과 함께 파티를 열게 된다. 제일 중요한 원칙이 가장 외면당하고 만다는 것도 두 작품의 공통점이다. 왜 이걸 보는데 헌법 제1조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것도 혹시 가장 크게 외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당신은 누구인가

주민이 아니면서 아파트의 주민인 척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김영탁은 모두에게 비난받는다. 하지만 김영탁은 주민으로서 항상 충실했다. 외부인을 수색해 가혹하게 내쫓을 때도 숨겨줬던 주민들은 잘못했다고 이백 번 외치게 하고 아파트에 그대로 머무르게 해 주었다. 먹을 것을 구하러 가는 방범대에도 늘 선두에 섰으며 심지어 자기가 가짜인 것을 알 수도 있는 옆집 학생이 돌아왔을 때도 받아주었다.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여기 주민이나 마찬가지라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자기가 바로 김영탁이라고 절규한다.


비록 사기당했지만 돈도 다 냈으니 주민이 맞다고만 우겼어도 됐는데, 그는 왜 김영탁의 이름까지 뒤집어쓰려고 했을까.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어디까지 뒤집어쓴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 집 마련, 서울에 내 소유의 아파트를 마련하는 것 그게 과연 내 꿈인가. 나는 어디까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뒤집어쓴 것일까. 내 꿈이 아닌 남의 꿈을 좇는 것만큼 허망한 일이 있을까. 김영탁이고 싶었던 사람은 이름을 빼앗기자 가족처럼 여기던 황궁아파트 주민, 옆집 고등학생을 순식간에 집어던져 죽였다. 자신의 진짜를 아는 유일한 사람, 내동댕이쳐서 죽어버린 것은 아마도 진짜 자기 자신이 아닐까.


정체가 드러나서도 그는 끝까지 적이 돼서 돌아온 외부인들을 막다가 그렇게도 소망했던 황궁아파트 902호에서 죽는다. 즐거운 나의 집이 서울의 아파트여서 그 사람은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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