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8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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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룬 어느 날 저녁의 풍경을 써 본 적이 있다. 대학교 사 학년 때 친구 둘과 함께 진지하게 썼다. 우스운 건 내가 무슨 내용을 썼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는 것이다. 대신 한 친구가 쓴 내용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 난다. 친구는 맨발로 자신의 농장에 서 있었다. 발바닥엔 부드러운 흙이 닿아있고, 어디선가 맛있는 음식의 향기가 난다. 아내가 저녁 식사를 만들고 있고 곧 친구들이 집에 찾아온다. 농장에 놀러 온 친구들과 맛있는 저녁식사를 한다. 친구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그의 농장에 놀러 가는 것을 상상했다. 그 풍경은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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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어떤 풍경을 썼던 것일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의 내 스탠스로 추정컨대, 아마도 정치인이 된 모습을 썼었을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왜 그런 걸 바랐는지는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 따돌림을 당했던 경험 때문일까. 어떤 세력의 중심축이 되는 것을 원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종이에 꼭꼭 눌러쓴 저녁 풍경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이 사라진 이유는 그것이 더 이상 내 꿈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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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명상 수업을 들으면서 비슷한 글을 한 번 더 써보게 되었다. 선생님은 말했다. 계획대로 모든 일이 다 잘 풀린다고 가정하고 10년 뒤에 나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 것인가? 최대한 자세하게 써보세요. 내가 잡은 연필은 멈출 줄 몰랐다. 선생님은 오 분을 주었는데 나는 날아가는 글씨로 흰 종이를 빼곡하게 메웠다. 내가 사는 집은 작업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작업실에서 만들고 싶은 물건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시간을 쪼개어 글을 썼다. 저녁에는 집에 놀러와 있는 친구와 어떤 책을 쓸 것인지를 의논했다. 십 년 전의 내 꿈과 비교하면 정말 다른 풍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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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대체로 나의 바람을 초월했다. 고3 때 인서울은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가장 가고 싶었던 대학에 합격했다. 그 학교 가서 꼴등 하는 것은 아닐까 했는데 장학금도 자주 받았다. 취직 못할까봐 오만군데 서류를 다 내고 다녔는데 회사도 잘 다니고 있다. 어쩌다 결혼도 했는데 남편도 시월드도 아무도 스트레스 주지 않는다. 이렇게 살다 보니 나는 한 가지 믿음이 생겼다. 내 미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 풀릴 것이다. 왜냐면 나는 주로 최악을 가정하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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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을 눈 앞에 두고도, 그걸 할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을 갖고도 시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도 그런 시기이다. 하고 싶은데 왜 못하는가, 이것에 대한 이유는 정말 많다. 어쩌면 내가 회사생활을 해온 8년 동안 매일매일 이유가 하나씩 생겼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대학교를 다닌 시간 동안에도 그 이유들을 만들어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 고3의 하루하루였을지도 모르지. 맹목적으로 좋은 대학을 가려고 했다. 경영학과를 지원하면서 거기서 뭘 배우는 줄도 잘 몰랐다. 알지도 못하는 미래의 괴물을 상상하고 혼자서 격렬하게 싸웠다. 막연한 불안이 만들어낸 괴물. 결국은 불안장애로 의식을 잃었으면서. 나를 잡아먹는 것은 실체 없는 불안이 전부였다. 이제는 이것을 버려야 좀 더 쉽게 원하는 걸음을 디딜 수 있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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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버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른다. 그래도 괜찮은 길을 찾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그만두기 위해서 일한다는 사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오랫동안 한 서비스에 몸담았는데, 그 서비스가 워낙 방대하고 복잡해서 그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없어도 서비스가 잘 돌아가게끔 만들어 나가는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것이 그 사람이 회사를 그만두기 위해서 일하는 방식이었다. 그만둔다는 선택을 당장 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을 하면 내 마음이 괜찮을까. 나는 오늘도 그런 것을 고민한다. 이것이 꿈을 위해서 내가 다가가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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