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

day-10

by Lu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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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때 수채화를 그리면 흰색 물감을 많이 썼다. 원하는 만큼 색이 밝지 않으면 흰색을 더 짜서 칠했다. 물 묻은 붓의 거친 스침을 견디지 못하고 종이는 벗겨졌다. 지우개를 문지르면 나오는 때처럼 종이 때가 벗겨져 나왔다. 우리 집에 와서 과외를 해주던 미술선생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엄마와 상담을 했다. 아무래도 나는 미술은 아닌 거 같다고 선생님은 말했다. 나는 수채화를 그리는 시간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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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 가서 유화를 배우게 되었다. 나는 아크릴 물감을 사서 명화 모작을 그렸다. 캔버스는 아무리 칠해도 벗겨지지 않는다. 아크릴은 밝게 그릴 때 물이 아니라 흰색 물감을 섞는다. 나는 책상 위에 캔버스를 올려놓고 새벽까지 그렸다. 그때 그린 그림이 아직도 친정집에 걸려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재밌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고3 때 부모님에게 말씀드렸다. 진로를 미술로 바꾸고 싶다고.


3

엄마는 미술 과외나 학원을 보내주기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는 내가 예술이 아니라 적당한 문과나 상경계 전공을 선택하길 바랐다. 아빠는 무슨 생각이 었는지 모르겠다. 아빠는 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다. 대신 아빠는 너 학원 보내줄 생각은 없어. 이건 뭐 하라는 건지 하지 말라는 건지. 아빠에게는 말대꾸하지 않는 것이 집안의 원칙이라 더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뒤로는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장래희망도 없었고 적당히 취업 잘된다는 경영학과로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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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휴가 쓰지 말고 나와서 10원이라도 더 벌어. 이런 말을 들으면서 회사를 다닐 때였다. 나는 퇴근시간이면 저녁밥을 먹지 않고 문화센터로 달려갔다. 가서 찰흙으로 액세서리를 만드는 것을 배웠다. 한 시간 동안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며 물건을 만들고 다시 회사에 들어가서 야근을 했다. 잠깐 동안 하는 일에 온전히 몰입하는 시간은 큰 휴식이 되었다. 결국 나는 폴리머클레이 아트 자격증을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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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재봉틀을 배우기 시작했다. 공방에 가서 천을 재단하고 재봉틀 앞에 앉는다. 천을 다리고 뒤집고 바느질하다 보면 세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물건을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는 기분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계란 프라이 무늬 천을 사서 남편이 들고 다닐 가방을 만들었다. 내부에는 병아리 무늬 천을 썼다. 안주머니를 바느질해서 달면서 여기에 핸드폰을 넣고 다닐 남편의 모습을 상상했다. 쓸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을 생각하며 물건을 만드는 일은 더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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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인사업무가 즐거웠던 것은 회사 동료들을 알고 지내기 때문이었다. 동료들이 뭔가를 물어보면 적극적으로 알려주고, 많이 물어보면 매뉴얼로 만들었다. 사내의 구성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서 제공하는 것이 인사가 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인사는 CEO나 경영진의 생각을 실현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 내 리더가 이런 말을 했었다. 인사는 동기부여다. 나는 아직도 그 말을 믿고 있다. 사람들이 일할 맛 나게 하는 거, 그게 인사가 하는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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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봉틀 첫 수업은 재료가 포함된 과정이었다. 선생님이 준 파란 천에, 빨간 지퍼를 달아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만들었다. 이왕 시간을 들여서 만드는데 이런 색 지퍼를 달아야 한다니. 수업받는 중간중간이 안타까움의 연속이었다. 내가 원하는 천을 가져가서, 원하는 물건을 만들게 되면 만드는 내내 즐겁다. 완성을 못하고 집에 돌아올 때면 빨리 완성하고 싶어서 당장 재봉틀을 사고 싶을 정도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그런 류의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좋아할 만한 나만의 결과물을 만드는 것. 그게 뭐가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도 좋아하고 남도 좋아하는 거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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