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자-3

day-13

by Lucie

1

아는 척은 나의 고질병 중 하나였다. 어떻게 보면 모르는 내용에 대해서도 직감을 발휘하는 것을 익숙하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직감적으로 말이 안 되어 보이는 소리를 듣고 에이, 그게 말이 돼? 그럴 리가 없어,라고 했다가 틀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재밌는 것은 나의 단호한 발언 때문에 다들 내 말이 맞는 줄 알곤 했다는 것이다. 나는 전혀 모르는 사실에도 어떻게 그렇게 용감해질 수 있었을까.


2

대학에 가서 처음으로 매력을 느낀 학문은 철학이었다. 철학 수업은 흥미로운 질문들과 그 질문에 대한 개성 있는 대답으로 가득했다.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나에 대한 기억의 다발'이다. 이런 것을 읽으면 오만 잡생각을 꽃피웠다. 누군가 나보다 나에 대한 더 많은 기억을 갖게 된다면 나는 그와 서로 누가 나인지를 싸워야 하는 것일까. 그럼 기억을 잃게 되면 내가 더 이상 '나'가 아닌 것일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뇌인데 목이 잘리면 머리 쪽이 나일까 몸쪽이 나일까.


3

더불어 대학 토론대회에 자주 나가게 되면서 말을 아무렇게나 하면 바로 털린다는 것을 더 체감하게 되었다. 한미 FTA 관련 토론을 할 때 나는 미국이 한국보다 특허가 더 많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상대편에서 그 내용에 대한 근거를 요청했다. 근거가 있었나, 생각해봤는데 그냥 내가 그렇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었고 사실에 기반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거기서 아니 특허는 당연히 미국이 더 많지, 이런 직관적인 말을 한 번만 더 뱉었다가는 대단한 사대주의자가 될 뻔했다.


4

나라는 몸뚱이를 이끌고 살면서 '나'라는 것에 물음을 던지는 것. 당연히 사실이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이 아님을 들춰보는 일.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나는 아는 척이라는 고질병을 아주 조금 고쳤다. 그런데도 요즘 정말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오늘만 해도 회의 중에 아 그건 아닌 것 같다고 제지를 하려다 어렵게 참았다. 다 참지도 못하고 '아니 그거는, 하... 말씀하세요.'라고 말을 흐려서 넘겼다. 상대는 나보다 회사 생활을 칠팔 년은 더한 사람이다. 나는 뭘 안다고 그 방법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하려고 한 것일까.


5

같은 질문을 다섯 번 해도 다섯 번째 대답을 처음처럼 해주던 대리님과 과장님이 생각나는 밤이다. 나한테 누군가가 똑같이 했다면, 나는 그 사람에 대해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이 사람은 메모하는 습관도 없고 남에게 물어보는 방법밖에 모르는 한심한 자다. 그리고 그런 시선으로 그 사람을 바라봤을 것이다. 그 사람은 아마도 영원히 그런 사람으로 나에게 남았겠지. 과장님은 어떻게 그런 나를 참고 넘어갔냐고 물어봤을 때 과장님은 웃으면서 말했다. 알려줄 만했으니 알려줬겠지 하하.


6

어떤 사람의 일면만 보고 판단해 버리는 것은 정말 위험한 아는 척일 수밖에 없다. 또 생겨난 어떤 판단에 의존하여 그 사람이 말하는 내용을 해석하는 것도 위험하다. 나는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 오늘도 판단을 미루는 법을 연습한다. 어쩌다 이런 아는척하는 고질병에 걸려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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