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day-15

by Lucie

1

화장실 청소는 세면대부터 시작한다. 세면대에 세제를 뿌리고 수도꼭지에는 치약을 묻힌다. 아직 적당한 솔을 사지 못해서 세면대 청소는 칫솔로 한다. 선반에 들은 낡은 칫솔을 꺼내 빠르게 세면대 전체를 문지른다. 수도꼭지도 안 보이는 뒷면까지 잘 문지른다. 샤워기로 물을 틀어 뿌린다. 물이 내려가면서 표면이 반짝인다. 물이 내려가는 수챗구멍의 스댕까지 반짝거리게 문대고 나면 다음은 바닥 차례다.


2

바닥청소는 크고 손잡이가 긴 솔로 문지른다. 그 솔로 바닥을 문지르면 쓱-싹-쓱-싹-하고 소리가 난다. 하아. 오늘 하루 쌓인 마음의 때가 벗겨지는 것 같은 소리다. 사실 애당초 바닥은 별로 더럽지 않았다. 구석에 작게 피어난 곰팡이 때는 어차피 그런 큰 솔질로는 벗겨지지 않는다. 결국 똑같은 바닥이라는 소리다. 그런데도 나는 속이 시원하다. 얼마 전까지 화내고 있던 마음은 그 자리에 없다. 아 화장실 청소는 스트레스 해소에 좋구나. 다시 한번 실감한다.


3

고등학생 때는 극도로 화가 나면 노트를 펴고 글을 썼다. 종이에 연필로 화를 내는 것은 집안에서 방해받지 않고 실컷 화를 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욕으로 시작했지만 중간쯤에는 다짐이 나온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 마지막쯤에는 질문이 나온다. 지금 내가 이렇게 혼자 화내서 얻는 득이 뭘까. 내가 이렇게 화가 나있다는 것을 상대방이 알까. 나는 왜 화가 난 걸까.


4

분노의 일기 덕분에 나는 내가 어떤 때 화를 내는지 알게 되었다. 화나는 케이스 스터디를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도 또 화가 나있는 저녁이었다. 나는 왜 화를 낸 것일까. 누군가 권위를 이용해서 원하는 바를 설명 없이 이루려고 했다. 불합리했기 때문에 화를 낸 것 같다. 이렇게 써놓고 나니 화내지 말걸,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스스로도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불합리를 생산해 내면서 사는데 이런 걸 갖고 화를 냈나. 몸에 해롭게.


5

화장실 청소 중간쯤에는 감정이 참 일시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화장실 청소에 집중하면 화가 사라진다. 내일도 그냥 나의 할 일에만 집중하면 화낼 일도 별로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 좋은 감정들은 그냥 나를 스쳐 지나갈 수 있도록 놓아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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